반적으로도 ‘아’와 ‘어’는 다르다고들 하는 판인데, 외교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한창 <말>지를 챙겨보던 때, 내가 항상 제일 먼저 (혹은 다른 기사는 안 보더라도 이것만은 반드시) 들여다보던 페이지는 데스크칼럼과 정성일 선생의 영화평이었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스크랩해 두었는데, 미국과의 협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딱 떠오르는 칼럼이 있어 노트를 뒤져보니 아직 남아 있다. 오랜만에 다시 읽고 새삼 무릎을 쳤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마침 누군가 전문을 올려놓았기에 이 공간에도 갈무리해 둔다.


EP-3와 푸에블로호

"귀국의 조종사 및 전투기의 실종에 대해 충심의 유감(sincere regret)을 표한다." "중국 인민과 조종사 왕웨이 가족에게 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우리가 매우 미안(very sorry)해 하고 있음을 전해 달라." "무단으로 중국 영공을 침범하고 비상착륙한 데 대해 매우 미안(very sorry)하다."

지난 4월 1일 미국의 EP-3 정찰기와 중국의 F-8 전투기가 중국 영공 부근에서 충돌, 미 정찰기가 하이난섬에 비상착륙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10일 후, 미국이 정찰기에 탑승했던 24명의 미군을 돌려받으면서 그 대가로 중국에 건넨 문서에 표현된 문구다. 외교 관례상 가장 높은 수준의 사과표현인 '사죄(apology)'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very'를 연발하면서 최대한 자세를 낮추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긴 24명의 미군이 사실상 '인질'로 중국 수중에 있는 한 미국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부시는 지난해 선거유세 때부터 "중국은 군사적 야심이 있는 나라다. 단호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대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취임 이후에도 잇단 대외강경책을 표명하면서 한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클린턴 때와는 다를 것이다. 클린턴이 앞으로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우쭐댔다. 불과 사고 열흘 전, 럼즈펠드 국방장관으로부터 "향후 미국의 제1주적은 중국"이라는 보고를 받고 크게 흡족해 했던 부시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콧대가 중국의 강펀치 한방에 폭삭 주저앉은 꼴이다. 아마 지금쯤 클린턴은 마음이 상하기는커녕 '그러길래 날뛰지 말고 조심하랬잖아'하며 고소해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지구상의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사죄'를 받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강대국 중국도 못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어려운 사죄를 당당하게 받아낸 나라가 있다.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1968년 12월 23일, 미국인들의 명절 크리스마스 연휴를 하루 앞둔 날의 일이다.

"미국 함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해를 침범해 중대한 첩보행위를 저지른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으로 엄중하게 사죄한다(apologize)."

이로부터 11개월 전인 1월 23일, 북한은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대해 정찰활동을 하던 푸에블로호를 나포했었다. 푸에블로호는 이번의 EP-3 정찰기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했다. 전함이 아니라 정찰함이라는 것, 승무원 82명이 인질로 잡혔다는 것,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뾰족한 대응방안이 없었다는 것 등이다.

당시 미국은 즉각 비상사태에 들어가 펜타곤에서 긴급 작전회의를 하는 등 수선을 떨었지만 북한이 요지부동의 완강한 자세를 보여 어쩔 수가 없었다. 미해군 함정이 무력으로 나포된 것은 당시로서 150년 해군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이후 아직까지도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존슨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수시로 참모에게 "푸에블로호에 관해 뭐 새로운 거 있나?"하고 신경질적으로 묻곤 했다. 나중에는 아예 말을 줄여서 시도 때도 없이 참모를 불러 "푸에블로"하고 외마디를 질러대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포에서 승무원 석방까지 무려 11개월이 걸린 데서도 드러나듯이 북한의 태도는 완강했다. 북한이 미국에 요구한 것은 단순했다. 이른바 3A. 미국이 불법적 정찰활동을 벌인데 대해 '인정하고(Admit), 사죄하고(Apologize)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확약하라(Assure)'는 것이었다. 결국 260여 차례에 걸친 지루한 공식, 비공식 회담 끝에 미국은 3A를 고스란히 담은 문서에 서명하고서야 82명의 승무원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1월 24일, 미국측 협상대표 존 빅터 스미스 장군과 북한측 협상대표 박충국 장군이 판문점에서 마주 앉았을 때의 일이다. 스미스 장군이 말했다. "두 가지를 해줘야겠소. 첫째는 승무원들을 즉각 돌려보내는 것이고, 둘째는 공해상에서 불법 나포한 것에 대해 우리 미국에게 사죄하는 것이오." 이에 대한 북측 박 장군의 응답 첫마디가 가관이었다. "우리말에 '달밤에 개 짖는 소리'라는 게 있소."

북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날 국제관계가 어디 사상이나 철학 가지고 좌우되는 상황인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견해를 떠나서 국가인격의 자존심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미국은 지난 55년 동안 신(神)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어떤 사소한 이유로도 미국을 비판할 수 없었고, '반미'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마치 신의 권위에 대한 불경스런 도전처럼 불온시 돼 왔다. 아마 미국인 가운데 가장 충실한 애국자도 이 지경은 아닐 것이다.

최근 중국과 미국의 비행기 충돌을 둘러싼 공방을 보노라니 민족자아가 결핍된 기형적 미숙아들이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더욱 안쓰럽다. /by 월간 말 2001년 5월 김성환 편집국장


덧) 천정환 선생의 블로그(http://blog.naver.com/heutekom.do)에 가니 재미있는 글도 보인다. 매일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서 쥐 박멸을 외치고 있는데 효과가 없다며 쥐 퇴치법을 묻는 네티즌의 질문에 대한, 세스코 측의 답변 :
"소리만 지른다고 쥐가 퇴치되지는 않습니다."
"서식처를 찾아 제거하고 주 침입경로를 막는 것이 가장 효과적..."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