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제목이 ‘후진’ 책을 보면, 이 책은 왜 제목이 이럴까 궁금해하곤 했다. 근사한 제목을 붙였다면 잘 팔렸을 텐데, 애초에 작가가 제목을 그럴싸하게 짓지 못했다면 담당 에디터라도 나서서 바꿔야지. 하지만 편집자로서 경력이 조금 쌓이고 나니 알겠더라, 그게 반드시 쉽지만은 않다는 걸. 일단 작가가  붙인 제목을 건드리는 게 어렵다. ‘원작의 훼손’ 운운하는 얘기를 들을까 봐 겁도 난다. 제목을 바꿔서 잘 되면 좋겠지만 그렇다는 보장도 없다. 원래 제목 그대로 두면 최소한 욕은 안 먹는다. 뭐, 찾아보면 이유야 얼마든지.

언젠가 <칼의 노래>를 만든 출판사의 편집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칼의 노래>의 원래 제목은 ‘칼의 노래’가 아니었단다. 처음 원고를 받아든 편집장이 작가 김훈 씨를 어렵사리 설득하여 제목을 바꾼 거라고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김훈 선생의 차기작이 <현의 노래>였으니 작가 스스로도 바뀐 제목에 만족했다는 얘기이리라. 무척 바람직한 케이스라 할 수 있겠다. <칼의 노래>의 원래 제목은 ‘광화문 그 사내’였다.

나는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곤 하는데,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원고를 보낼 때 제목을 지어서 보낸 적이 거의 없다. 당연히 제목을 정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래서 담당 기자가 원고를 읽고 난 후에 알아서 제목을 붙여준다. 나중에 어떻게 달았나 살펴보면, 8대2 정도로 잘 붙여 주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글을 쓴 이는 아무래도 감정이입이 되어 있어서, 말하자면 훈수를 두는 이가 그런 면에서는 글을 ‘잘’ 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좋은 제목’이란 어떤 걸까.

최근에 무슨 책을 읽다가 다시금 ‘제목 짓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장미의 이름> 제작노트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했던 말이다. “내 책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이라고 하게 된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나는 ‘장미’라는 말이 너무 풍성한 의미를 갖고 있어서 이제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했다. 그 제목은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어느 한 가지 의미를 선택할 수 없게 만든다. 제목은 독자들을 갈피를 못 잡게 해야지, 독자들을 통제해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된다. 인용한 나도 잘 모르니까. 하지만 이 문장과 마주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좋은 제목이란,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단어('장미', '이름')를 조합하여 생각지도 않던 새로운 이미지('장미의 이름')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그 새로운 이미지가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거야말로 좋은 제목이 아닐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지나치면 '낚시'가 될 테고, 세상에는 장르소설만 있는 게 아니니까. 다만 이번에 우리가 펴낸 <다이디타운>의 경우, 좀더 고민해 봤어야 하지 않나 싶은 후회가 든다.

‘다이디타운’이라니... ‘코리아타운’도 아니고 ‘차이나타운’도 아니다. 그게 도대체 뭔가. 내가 첫 번째로 책을 전해준 독자로부터 들은 불만이다. ‘다이디타운’이라고 하면 너야 알겠지. 아마 장르를 많이 읽는 독자들 역시 알 거야. 그래, 그래서 너와 네 출판사에 호의적인 독자들만 사면 그만이라는 뜻인 거지? 마니아가 아닌 나 같은 독자들은 겨우 교보문고에 깔린 책을 들춰보고 마음에 들면 사는 형편인데, 밑도 끝도 없이 다이디타운이라니 들춰보고 싶은 마음이라곤 발톱에 때만큼도 안 생길 것 같은데. 우리 나라 작가가 쓴 책도 아니고 번역물이잖아.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라, 정성들여 문장을 번역하는 만큼 제목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고. 난, 너가 만날 부르짖는 ‘장르’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 오만하다고 할까. 물론 너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상업출판을 하는 사람이다. 좋은 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딱 그만큼 잘 파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다이디타운’의 경우 분명히 좀더 고민했어야 했다. 앞으로 기억해 두어야겠기에, 굳이 기록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