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예고의 변

from 편집 일기 2008/06/11 11:26


가 책 제작 관련한 수업을 들을 때, 사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원고가 들어오고 디자인만 완성되면 책이 만들어진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천만에 말씀이다. 제작을 우습게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편집자들이 의외로 제작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책의 완성일자를 박아놓고 작업을 하다 보니, 빨리빨리, 얼른얼른, 이러다가 사고를 친다. 출판사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보채니까, 인쇄소나 제본소에서도 급한 마음에 임의로 작업을 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다가 사고 난다. 출간 일자를 박아놓고 책을 만드는 건 굉장히 위험한(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거 뭐 뜬구름 잡는 얘기가 될 테지만, 미국의 어느 출판사의 경우 보통 완성된 책의 가제본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고 합니다. 가제본은, 책에 추천사를 써 줄 사람, 리뷰어, 각 언론사에 전해지지요. 무려 6개월이나 전에 말이에요. 6개월간의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마케팅 전략을 세워 책을 출간한다더군요. 그 과정에서 오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미비점들을 발견하기도 하구요. 부러운 얘기입니다. 물론 우리도 한가롭게 이런 말을 늘어놓을 처지는 아니에요. 북스피어 역시 매번 ‘다음에는 충분히 시간적 여유를 두고 책을 만들자’고 다짐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절대 생각한 대로 되지를 않아요. ‘빨리빨리’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북스피어 초기에,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출간예고제’라는 걸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실패했지요. 대실패. 대충 원고 받고, 대충 교정 보고, 대충 디자인 작업하고, 인쇄소랑 제본소 독촉해서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리면 어떤 책의 디자인은, 어떤 책의 제작은…… 그런 식으로 작업한 적도 있습니다. 깨달음은 아픔을 동반하더군요. 이거이거, 나중에 굉장히 후회스럽더이다. 하지만 지금 ‘타임 트립(Time Trip)’하여 당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이 작업할 것만 같아요. 뭐랄까…… 조바심. 지금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 그런 습성이 몸에 박혀 지시를 내리기 때문에, 안 내면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상상 때문에 그만. 편집자들은 죄가 없어요. 내자고 보채는 건 통상 ‘오너’들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 건지 눈치 채셨습니까. *^^*

이 책이 언제 나오느냐 물어봐 주시니 고맙고, 관심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어 뿌듯하긴 합니다만, 언제 나온다 딱 부러지게 말씀드리기가 애매해 곤란할 때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허나 기다리는 독자 분들이 워낙 많으시고. 홈페이지로, 메일로, 전화로 문의를 하시는데 안 대답해 주면 성의가 없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일말의 계획도 없이 출판을 하는 것처럼 무능하게 비춰질까 싶기도 하고. 대답을 해 드리자니, 중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출판사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는데, 예고한 날 맞추자고 책을 대충 만들 수는 죽어도 없는데…… 하는 마음에 고민스럽고. 해 놓고 날짜에 맞춰서 제때 못 내면 미안하고.

물론 이 책이 대관절 언제 나오느냐, 물어봐 주시는 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음’을 헤아려 주시길. 늦으면 늦는다 공지할게요.


텐도 아라타
『영원의 아이』는 아마 초미의 관심사일 터, 일단 국내에 한 번 나왔던 책이기 때문에 만드는 이들 모두가 흡족하게 생각할 정도로 잘, 완성도 있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못 냅니다. 중간에 급하다는 핑계로 대충 내는 일 결코 없습니다. 덩치도 상당한 만큼 시간이 필요합니다. 출간일은 …… ‘겨울의 첫날’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당초 올 여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불가합니다. 기다리시는 김에 겨울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벨린저
『가모우 저택 사건』이 끝났기 때문에 곧바로 벨린저 작업 시작합니다. 『연기로 그린 초상』과 『기나긴 순간』 같이 나옵니다. 7월에 나옵니다. 두 작품 다 번역 끝났습니다. 디자인과 교정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디자인은 약간 걱정이 됩니다. 이 훌륭한 디자이너는, 만족스런 시안이 나오지 않으면 종종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집니다. 디자이너 님께서 분투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조너선 캐럴
현재로선 차기작을 낼 계획이 없습니다. 내긴 내겠지만, 『웃음의 나라』 정도가 얼마간 선전할 뿐 『벌집에 키스하기』와 『나무바다 건너기』의 경우 북스피어의 다른 책에 비해 (재미는 똑같은데) 판매가 신통치 않아서 좀더 지켜보려고 합니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반드시 냅니다. 다른 책 많이 팔아서 자금이 마련되면 바로. 그때가 언제일지는 저도 모릅니다

미야베 미유키
7월 말에 『괴이』(怪異, 가제)가 나옵니다. ‘달밤에 읽는 무시무시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여름에 읽기 좋을 듯합니다. 『괴이』까지 내고 나면 미출간 ‘미야베 월드’는 이제 여섯 타이틀 남습니다. 향후에는 좀 느긋하게 내도록 하겠습니다. 미미 여사의 작품들이 너무 몰려 나오는 바람에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시던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반년에 한 작품 정도 출간할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괴이』의 다음은 올 겨울, 한창 추울 때 만나실 수 있겠습니다.


삼 년이면 서당개도 뭘 한다는 판에, 북스피어도 앞으로 좀더 강해지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