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김정란, 권성우, 이명원이 있었다. 언제인지 딱 꼬집어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세기말에 시작된 일들이다. '문학권력' 논쟁이라 했다. 표면적으로 논쟁의 시발은 「문학과 사회」에 대한 비평가 권성우의 문제제기(문사 2000년 여름호)였지만, 이미 강준만이 단행본 『인물과 사상』을 통해 문학과 언론의 유착을 파헤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킨 상태였고, 김정란이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1999년)』에서 신경숙과 은희경의 문학관을 비판하여 화제를 모았으며, 이명원이 『타는혀(2000년)』를 통해 김윤식 교수의 표절 문제를 건드려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입장을 밝혀야 할 상대(문지, 창비)들은 소박하게나마 어떠한 대응도 거의 하지 않았고, 언론은 제2의 공방이나 몇 라운드 같은 타이틀을 붙여 가며 양쪽 다 비난하기 바빴다. 정작 문제는,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들이 '음험한 세력'으로 매도당했다는 거다. 권력에 대해 비판하면서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다. 덕분에 이들은 문단에서 완전히 소외돼 버렸다. 김정란과 이명원, 심지어 '문지 3세대'로 분류됐던 권성우 등의 비평가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신세대 문학'의 기수이자 문지와 창비로부터 공히 높은 평가를 받던 소설가 백민석은 단지 '안티조선 운동'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문단'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특정 에콜과 몇몇 문예지들의 화를 사지 않도록 조심조심 새앙쥐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안이하고 안전한 비평 행위를 통해 이른바 주류 문예지들의 문학적 프레임 속으로 편입된다. 뭐,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 문학적 프레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뻔히 보며 엇나가는 글을 쓰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요컨대 그런 종류의 일은 우리 주위에서도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문학이라고 해서 고결하고 순수한 별종의 인간들이 하는 건 아니다.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이 그 사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고, 그것을 마음속의 조그만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뚜껑을 닫고, 괴로운 일은 생각하지 않도록, 선수끼리 안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비평을 해왔던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한 척하면서 상대방의 입장과 해석을 방치하고 있는 상태>. 급기야 어떤 문제작이 나와도 여러 가지 해석보다는 천편일률적 비평이, 치밀한 분석보다는 부적절한 과잉 해석이 난무하게 되었고, 일각에서는 돌연 <우리 문학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역설하기도 한다. 90년대, 독자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현상의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 거의 모든 비평적 발언은 그 배후와 이해관계를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논쟁과 상처』의 한 대목이다. 굳이 권성우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소설책 뒤에 씌어진 주례사들을 접해본 독자라면 아마 이런 생각 한두 번쯤 해 봤을 것이다.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과장된 수사와 어렵기 짝이 없는 외국이론으로 점철된 작품 해설, 읽기에 불편한 소설은 가치가 있고 재밌고 읽기 쉬운 소설은 가치가 없다는 식의 권위주의적 비평. 감상과 비평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남은 것은 책의 판매부수뿐. 권성우는 같은 책에서 그 작동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해당 신간 작품 뒤에 붙어 있는 유력한 비평가의 호의적 해설이나 문예지의 리뷰 및 서평을 통한 적극적인 의미 부여(A)
2) 그 해설 및 리뷰를 중심으로 한 신문 문학기사의 전파 및 인용(B)
3) (A)와 (B)가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의 상징권력으로 작용하면서 그 작품의 이미지와 평가에 대한 막대한 영향을 미침.
4) 문학적 상징권력을 획득한 작가가 발표한 태작조차 언론의 적극적인 관심사가 되고 호의적인 비평적 조명을 받음.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마침내 문학적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 몇몇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유력한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들의 에세이, 독서일기, 영화평, 결혼, 일상 등등의 다양한 글쓰기 및 관심사가 언론과 대중들의 관심사로 작용하기 시작함.
5) 이제 작가 자체가 일종의 상징권력이 되어, 해당 작가를 비판하는 글쓰기 자체에 상당한 부담이 형성됨.
그러다 보니 비평가 (작가) 사이의 생산적인 논쟁이나 본격적인 싸움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내가 구린데 누굴 깐단 말인가. 체질적으로 약해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부성찰적인 연찬 없이 학문은 절대로 발전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할 비평가들 사이에서조차 기본적인 '훈련'이 안 되어 있다 보니 창작을 하는 작가들 역시 어지간한 비판도 견뎌내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작가들이 쓰는 소설이란 시시하거나 심지어 위험하기도 하다. 더불어, 그런 소설과 그런 비평과 그렇고 그런 문학이 실리는 문학 잡지는 이제 잘 안 팔린다.
물론 모든 비평가들이 싸움을 벌일 이유는 없다. 같은 책에서 권성우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비평가가 논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몇 논쟁을 진행하면서, 논쟁을 통한 '상처'의 체험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상처받기를 회피하는 이 시대의 비평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통과제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논쟁은 자신의 편향과 입장,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논쟁의 상처를 통해서 비평가는 진정으로 성장한다고."
요즘 디워를 둘러싼 몇몇 글들을 보면서 새삼 권성우의 이 말을 떠올렸다. 논쟁의 상처를 통해 비평가는 성장한다니, 근사하지 않은가. 일견 고개도 끄덕여지고.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욕할 거 하나 없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마련이다. 자신이 확보한 시야를 벗어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타인의 취향도, 타인의 취향을 둘러싼 세계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매주, 서로 지 주장만 하다가 끝나는 100분 토론을 보라. 그러니 논쟁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다거나 쓸데없는 짓거리라며 혀를 끌끌 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누가 맛이 갔다느니, 누가 약발이 다 됐다느니, 누가 뜨니까 배가 아파서 뭘 썼다느니, 누가 누구의 에피고넨이라느니... 요즘 들어 이런 말들이 왜 이렇게 듣기 거북한지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논쟁에 참여하는 건 고사하고, 낄 엄두 자체도 내지 못하는 이들의 비아냥거림보다는 역시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지는 논전을 좀더 구경하고 싶다. 어느 논객의 말마따나 상대방의 주장을 무기 삼아서 하는 칼싸움이라니,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혹시나 찔리면 툭툭 털고 일어나 패한 것을 인정하면 된다. 칼이야 얼마든지 새로 만들면 되고. 아, 글쎄 칼 들 자신 없는 구경꾼들은 고마 그 입 좀 다물어 주시고.
하지만 입장을 밝혀야 할 상대(문지, 창비)들은 소박하게나마 어떠한 대응도 거의 하지 않았고, 언론은 제2의 공방이나 몇 라운드 같은 타이틀을 붙여 가며 양쪽 다 비난하기 바빴다. 정작 문제는,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들이 '음험한 세력'으로 매도당했다는 거다. 권력에 대해 비판하면서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다. 덕분에 이들은 문단에서 완전히 소외돼 버렸다. 김정란과 이명원, 심지어 '문지 3세대'로 분류됐던 권성우 등의 비평가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신세대 문학'의 기수이자 문지와 창비로부터 공히 높은 평가를 받던 소설가 백민석은 단지 '안티조선 운동'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문단'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특정 에콜과 몇몇 문예지들의 화를 사지 않도록 조심조심 새앙쥐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안이하고 안전한 비평 행위를 통해 이른바 주류 문예지들의 문학적 프레임 속으로 편입된다. 뭐,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 문학적 프레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뻔히 보며 엇나가는 글을 쓰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요컨대 그런 종류의 일은 우리 주위에서도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문학이라고 해서 고결하고 순수한 별종의 인간들이 하는 건 아니다.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이 그 사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고, 그것을 마음속의 조그만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뚜껑을 닫고, 괴로운 일은 생각하지 않도록, 선수끼리 안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비평을 해왔던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한 척하면서 상대방의 입장과 해석을 방치하고 있는 상태>. 급기야 어떤 문제작이 나와도 여러 가지 해석보다는 천편일률적 비평이, 치밀한 분석보다는 부적절한 과잉 해석이 난무하게 되었고, 일각에서는 돌연 <우리 문학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역설하기도 한다. 90년대, 독자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현상의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 거의 모든 비평적 발언은 그 배후와 이해관계를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논쟁과 상처』의 한 대목이다. 굳이 권성우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소설책 뒤에 씌어진 주례사들을 접해본 독자라면 아마 이런 생각 한두 번쯤 해 봤을 것이다.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과장된 수사와 어렵기 짝이 없는 외국이론으로 점철된 작품 해설, 읽기에 불편한 소설은 가치가 있고 재밌고 읽기 쉬운 소설은 가치가 없다는 식의 권위주의적 비평. 감상과 비평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남은 것은 책의 판매부수뿐. 권성우는 같은 책에서 그 작동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해당 신간 작품 뒤에 붙어 있는 유력한 비평가의 호의적 해설이나 문예지의 리뷰 및 서평을 통한 적극적인 의미 부여(A)
2) 그 해설 및 리뷰를 중심으로 한 신문 문학기사의 전파 및 인용(B)
3) (A)와 (B)가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의 상징권력으로 작용하면서 그 작품의 이미지와 평가에 대한 막대한 영향을 미침.
4) 문학적 상징권력을 획득한 작가가 발표한 태작조차 언론의 적극적인 관심사가 되고 호의적인 비평적 조명을 받음.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마침내 문학적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 몇몇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유력한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들의 에세이, 독서일기, 영화평, 결혼, 일상 등등의 다양한 글쓰기 및 관심사가 언론과 대중들의 관심사로 작용하기 시작함.
5) 이제 작가 자체가 일종의 상징권력이 되어, 해당 작가를 비판하는 글쓰기 자체에 상당한 부담이 형성됨.
그러다 보니 비평가 (작가) 사이의 생산적인 논쟁이나 본격적인 싸움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내가 구린데 누굴 깐단 말인가. 체질적으로 약해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부성찰적인 연찬 없이 학문은 절대로 발전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할 비평가들 사이에서조차 기본적인 '훈련'이 안 되어 있다 보니 창작을 하는 작가들 역시 어지간한 비판도 견뎌내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작가들이 쓰는 소설이란 시시하거나 심지어 위험하기도 하다. 더불어, 그런 소설과 그런 비평과 그렇고 그런 문학이 실리는 문학 잡지는 이제 잘 안 팔린다.
물론 모든 비평가들이 싸움을 벌일 이유는 없다. 같은 책에서 권성우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비평가가 논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몇 논쟁을 진행하면서, 논쟁을 통한 '상처'의 체험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상처받기를 회피하는 이 시대의 비평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통과제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논쟁은 자신의 편향과 입장,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논쟁의 상처를 통해서 비평가는 진정으로 성장한다고."
요즘 디워를 둘러싼 몇몇 글들을 보면서 새삼 권성우의 이 말을 떠올렸다. 논쟁의 상처를 통해 비평가는 성장한다니, 근사하지 않은가. 일견 고개도 끄덕여지고.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욕할 거 하나 없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마련이다. 자신이 확보한 시야를 벗어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타인의 취향도, 타인의 취향을 둘러싼 세계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매주, 서로 지 주장만 하다가 끝나는 100분 토론을 보라. 그러니 논쟁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다거나 쓸데없는 짓거리라며 혀를 끌끌 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누가 맛이 갔다느니, 누가 약발이 다 됐다느니, 누가 뜨니까 배가 아파서 뭘 썼다느니, 누가 누구의 에피고넨이라느니... 요즘 들어 이런 말들이 왜 이렇게 듣기 거북한지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논쟁에 참여하는 건 고사하고, 낄 엄두 자체도 내지 못하는 이들의 비아냥거림보다는 역시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지는 논전을 좀더 구경하고 싶다. 어느 논객의 말마따나 상대방의 주장을 무기 삼아서 하는 칼싸움이라니,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혹시나 찔리면 툭툭 털고 일어나 패한 것을 인정하면 된다. 칼이야 얼마든지 새로 만들면 되고. 아, 글쎄 칼 들 자신 없는 구경꾼들은 고마 그 입 좀 다물어 주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