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모 평론가와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이 양반이 문득 묘한 얘기를 꺼낸다. 어떤 작가의 국내 첫 타이틀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고 감명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같은 작가의 책이 삽시간에 이 출판사 저 출판사에서 엄청나게 쏟아지더란다. 일단은 다른 작품도 찾아 (약간은 의무감에) 읽어보았다. 하지만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꺼번에 읽으려니까 대번 질리더라고. 일 년에 한 작품, 아니 반년에 한 작품 정도씩만 나와 줘도 그때그때 차분하게 읽어볼 텐데.” 이후로 그 작가와는 빠이빠이. 

그 평론가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겠다. 아니,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 역시 (독자 입장에서)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한가롭게 남의 얘기나 하며 실실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북스피어는 어떤가. 미야베 미유키라는 걸출한 작가의 책을 거의 두 달에 하나씩 내서 독자들을 질리게 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짧은 시간 안에 나오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 중도포기를 선언한 독자도 꽤 있으리라. 가당찮은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판형과 디자인을 고려해서 만든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 딱히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라고 왜 일 년에 한 권, 반년에 한 권 하는 식으로 장기적인 차원에서 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고 싶은 마음 정말이지 굴뚝같다. 하지만 여건이 녹록치 않다. 애초에 북스피어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든 작품을 다 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더라도 그토록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전부 계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은 계약금 문제가 있다. 우리가 맨 처음 계약한 타이틀 『누군가』의 계약금이 20만 엔이고 당시 환율이 800원 정도였으니, 한화로 160만원. 작품 열댓 개만 계약해도 2,000만원이 넘는다.

우리 같은 소규모 출판사에 그런 거액이 있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돈이 있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바로 계약기간의 문제다. 통상 원작의 번역 출판 계약기간은 5년이다. 계약한 그 시점에서 5년 안에는 번역해서 출판해야 한다. 계약해 놓고 못하면 그냥 날리는 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 년에 한 권 하는 식으로 속 편하게 책을 냈다가는 다섯 작품도 못 낸다. 그런 텀으로 내는 방식이 가능하려면 일 년에 한두 권 계약하고, 다음 해에 또 한두 권 하는 식으로 계약을 진행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가능하다. 단, 다른 출판사에서 절대로 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으면 말이다.

무슨 얘긴가.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무슨 작품이 뜨면 해당 작가의 책은 금세 계약금이 올라간다. 왜? 한국 출판사들끼리 경쟁이 붙기 때문이다. 경쟁이 붙으니 자연히 계약금도 올라간다. 20만 엔이 40만 엔이 되고 40만 엔이 삽시간에 400만 엔도 된다. 한 작품이 400만 엔씩 되는 경우, 실제로 많다. 그 돈을 주고도 계약을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른다. 경쟁 자체가 쓸모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하는 얘기다. 다음은 7월 9일자 <한국일보> 기사다.

번역서에 대한 판권경쟁이 가열되면서 일종의 계약금인 선(先)인세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출판계에 따르면 최근 출간된 『마지막 강의』의 선인세가 64만 달러(약 6억4,000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강의』의 경우 10여개의 국내 대형출판사들이 입찰에 뛰어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출판사들의 판권경쟁은 국부유출 논란과 함께 중소출판사를 고사시켜 장기적으로는 독자들의 선택권을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굳이 이처럼 극단적인 예를 든 이유는 최근에 『마지막 강의』의 일본 쪽 계약금(선인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일본어판 계약금은 한국어판 계약금의 1/8에 불과하다고 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니 계약금이 높은 것은 당연하지만, 일이억 원(도 큰 금액인데)도 아니고 양국의 계약금이 이토록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한국이 일본보다 시장이 여덟 배 정도 크거나, 아니면 일본은 나름대로 계약금 상승을 자제할 수 있는 출판사들 내부의 룰이 있거나.

해답이 뻔하니, 다시 북스피어 얘기로 돌아가 보자. 미야베 미유키의『이름 없는 독』을 계약할 당시의 일이다. 상당히 많은 한국의 출판사들이 이 타이틀을 계약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전작을 출판한 북스피어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계약금도 전작과 동일하였다. 나 그때 꽤나 감동 먹었다. 일본 출판계의 룰인 건지,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가 너그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번 출판했으니 가급적이면 계속 믿고 맡기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계속 속앓이를 해야만 했다. 일본 출판사 쪽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이나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작품에 대한 판권 문의가 한국의 여러 출판사들로부터 줄기차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일본 측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이거 저쪽 출판사에서 문의 들어왔는데, 너네가 할래? 할 거면 지금 계약해 줘야 될 거 같은데.” 상황이 이러니 우리로서도 도리가 없다. 일 년에 한두 권 계약하고 일 년에 한두 권 차분차분 출판한 다음, 해를 넘겨 다음 해에 한두 권 계약하고 그 해에 한두 권 내고....

어림도 없는 얘기다. 그런 방식으로는 한 작가의 전작을 장기적인 계획 아래 일관성 있게 낸다는 꿈은 도저히 꿀 수조차 없는 거다. 한꺼번에 계약할 수밖에 없는 거다. 5년 안에 다 낼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 쏟아지는 거다. 다른 출판사들도 비슷한 사정일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쫓겨서 계약을 진행하니 쏟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날릴 수는 없잖은가. 실제로 몇몇 편집자들과 만나 “아, 이거 누가 좀 말려주면 좋겠다” 하는 푸념을 하기도 수차례였다. 200만 원이면 할 수 있는 작품을 기어이 1억씩 주고 해야 쓰겠는가 말이다.

들입다 막 가면, 반드시 사고가 나게 마련인데


한국도 출판사들끼리의 신사협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만 한다. 신사협정이라니, 말은 쉽지만 내가 보기엔 요원하기만 하다. (나 포함해서) 다들 부조리를 성토만 할 뿐이다. 총대를 멜 사람이 없다. 누군들 좋은 작품, 좋은 작가와 계약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돈을 쳐바른다”는 소리 들으면서 계약하고 싶겠는가. 모든 출판사들이 다 마찬가지이리라. 그리고, 이게 바로 한 작가의 책이 뜨면 해당 작가의 책이 앞 다투어 우르르 쏟아지는 이유다. 뜨면 계약하자는 욕심, 비싸게 사와도 팔면 된다는 맹신. 광고로 밀어 베스트셀러만 되면 살 사람은 산다는 오만. 독자들 입장에서는 (북스피어 포함해서) 몽땅 다 나쁜놈 한심한놈 이상한놈 되는 거다. 

나는 지금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는 건방진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도 막 낸 주제에 남 욕할 입장도 아니다. 다만, 하도 답답해도 그런다. 답답해서. 다들 신간 종수 좀 줄이고, 나오는 책 한 권 한 권에 집중하고, 매출액은 제작부수가 아니라 판매부수로 책정하고, 계약에 원칙을 세워 경쟁도 정도껏 하면 좋을 텐데. 싸그리 욕먹고 망할 놈은 망하고 살아남는 놈은 살아남으면, 그럼 그냥 만사 오케이인 건지... 진짜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