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 『노인의 전쟁』을 한달음에 다 읽었다. 아니, 한달음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1부’의 읽기를 마쳤을 때 느슨해진 입가를 조이고 한숨을 돌렸다. 정신없이 160페이지가량을 읽고 나니 대관절 저자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졌던 거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프로필을 그제야 들여다보았다. 개인 블로그에 (‘노인의 전쟁’을) 연재하다가 인기를 끌게 되어 출간한 처녀작, 이라고 쓰여 있다. 지금은 “영미 SF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되어 있다고 한다. 

대개 ‘에스에프’라는 레테르가 붙은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 서사의 표면을 넘어서는 상상력의 진폭이 너무 커서 몰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대체로 시시한 ‘사실’이지만,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신경 쓰이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노인의 전쟁』을 읽으면서 감탄했던 대목은, 그러한 선입견을 염두에 둔 듯한 작가의 자신감이었다. 그 인상적인 어조에는, 흔히 기발하다거나 영리하다와 같은 수사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노회함’ 같은 게 담겨 있었다. 그간 ‘에스에프’라는 장르가 성취해낸 다양한 기법들을 들뜨지 않은 웃음으로 적절히 버무려 놓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일흔다섯 살 이상만 입대할 수 있다는 군대, 우주개척방위군(CDF). 작가가 CDF에 모아놓은 노인들로부터 찾아낸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혹은 죽음 이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아니었다. 그는 ‘늙음은 낡음’이라는 명제에 대해 좀더 넓은 지평에서 사유한 후 비로소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에스에프라는 장르의 외양을 빌려서 말이다. 일흔다섯 고리타분해 보이는 늙은이의 몸 냄새 속에 용해되어 있는 정신의 한 자락. 구태여 정의하자면, 그것은 희망이기도 하고, 늙음 역시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와 같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오글소프 중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과 마주할 수 있다. “이것이 CDF가 노인들을 병사로 삼는 이유 중 하나다-자네들 모두가 은퇴했으며 경제적인 방해물이라서 데려오는 게 아니다. 또한 자네들이 자기 목숨을 넘어서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네들 대부분은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과 손자들을 키워보았을 것이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일을 하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 개척민이 되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자네들은 개척행성이 인류에게 좋다는 사실과 개척민을 위한 싸움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이런 개념을 열아홉 살짜리의 뇌에 박아 넣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네들은 경험으로 안다. 이 우주에서는 경험에 의미가 있다.”

클리셰와 유머로 점철된 우주 활극의 끝에서 만나는 주인공의 어스름한 추억담(“내가 정말 그리운 건 결혼 생활입니다.”)은,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애닮(달)다. 하지만 혹시라도, 무슨 소리냐는 듯 삿대질을 하며 진부한 결말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불안이나 공포 같은 감정의 뒷면에는 언제나 ‘사랑의 부재’라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자못 낯간지러운 진실과 함께, 에스에프라는 장르의 넓고 유구한 역사를 정통으로 잇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 『노인의 전쟁』은 문학적 울림보다는 철저히 오락적 재미에 치중했고, 거기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자신의 안목에 대한 일말의 쪽팔림이나 지적 수준에 대한 의심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다른 이들에게 권해줄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소설이었다. 마침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같은 출판사에서 줄줄이 나온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겠다.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샘터/ 2009년 1월)


덧) 천명관 씨의『고래』를 읽은 후에, 천명관 씨의『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읽었을 때 약간 김이 빠지는 듯한 아쉬움을 느낀 적이 있다. 『노인의 전쟁』에 일말의 아쉬움이 있다면, 딱 그 정도? 여튼, 독후감이 쓰고 싶어질 만큼 재미있게 책을 읽은 건 정말이지 오랜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