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차이란 결국 문학 특유의 즐거움과 감동을 소수에게 주느냐, 다수에게 주느냐 하는 것인데, 가장 위대한 문학이란 그 두 부류의 독자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스터모던 비평의 선구자인 레슬리 피들러의 말입니다. 레슬리 피들러를 우리 나라에 소개한 김성곤 교수에 따르면, 그는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헉핀이여, 다시 뗏목으로 돌아와다오’라는 도발적인 글로 보수와 진보 사이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미국문학에 나타난 사랑과 죽음>이라는 비평서로 세계문단의 주목을 받은 비평가입니다. 엄숙주의로 가득한 문단과 학계를 싫어해서, <경계를 넘고, 간극을 메우며>와 같은 평론은 아예 <플레이보이>지에 발표하기도 했는데 후에 “문학의 확산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권위 있는 비평가나 작가가 대중문학 잡지에 소설이나 평론을 발표하고, 그럼으로써 그 대중문학 잡지가 권위를 가지게 되는 사례라면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도 <에스콰이어>나 <라이프>에 소설을 발표했고, <플레이보이>에 걸작 단편들을 기고한 수많은 에스에프 작가들도 있지요. 그럼으로써 헤밍웨이나 르귄 같은 작가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지 않나요? 우리 나라도 머지않아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가 없어지고, 권위 있는 작가나 비평가도 ‘매체의 우위’에 대한 집착 없이 글을 쓰게 될 겁니다.

...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웃자고 해본 얘기입니다. 물론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는 비단 우리 문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예요. 다만, 우리 문단의 경우 유독, 이상하리만치 민족문학에 집착한달까 하는 부분이 있어요. 마침 최근에 읽은 흥미로운 글이 있어서 길게 인용해 봅니다. ‘비평공간’이라는 사이트의 소조 님이 쓴 글입니다.

“오늘날 조중동이 양적으로 한국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면, 한국대중음악은 SM, JYP, YG가, 한국 문단문학은 창비, 문사, 문동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국 문학계와 한국 대중음악계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상품의 생산관리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보면 점점 유사해져 가고 있다. 문제는 한국 문단문학에 <한겨레>나 <경향신문>, <시사인>처럼 이념상 그리고 체질상 주류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천문학》, 《세계의 문학》, 《문학수첩》, 《현대문학》, 《문학사상》, 그리고 최근에 창간된 《자음과 모음》 등등의 면모를 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문학적 당파성)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곳의 필자들은 모두 창비, 문사, 문동과 공유(교환) 가능하다. 아니, 모두 창비, 문사, 문동에 글을 쓰고 싶어한다. 다른 곳의 청탁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더라도 이들의 청탁만큼은 모두들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바꿔 말해, 한국 지식인으로서 <조선일보>의 청탁을 거부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어려운 것은 한국 문학인으로서 《창작과 비평》의 청탁을 거부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Mission impossible)’인지도 모른다.”

순수문학 잡지 자체는 대중의 외면을 받고, 기존에 분담해 왔던 역할의 경계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에콜은 여전히 공고해 보입니다. 위 글에서 유추할 수 있듯 권위 있는 작가나 비평가들은 대중문학(혹은 장르문학) 잡지에 글을 쓸 생각이 없거나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글이 발표되는 순간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상징권력마저 환원되리라 생각)한 듯 보입니다. 게다가 천정환 선생이 잘 지적했듯 한국의 문단문학이 “장르문학을 출판자본과 ‘본격문학’의 질서 속으로 끌어안으려(?)한다”든가, “유력 지식인 잡지가 나서서 이전에는 거의 완전히 백안시해왔던 장르문학을 ‘본격문학’론이나 심지어 ‘민족문학’의 논리로 상대하려는 것” 등의 전략을 취하고 있고, 그와 같은 전략이 먹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알라딘 베스트셀러 순위와 그 책을 펴낸 출판사의 면면을 슬쩍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월간 <판타스틱>의 휴간이 있었습니다. '장르 전문’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 년여를 버텼을 때만 해도, 저는 <판타스틱>이라면 이른바 주류와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매체로 자리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일개 독자로서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 판타스틱 기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술한 사례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테지요. 애초에 시장 자체가 작아서일 수도 있고, <판타스틱>의 역량 부족일 수도 있고, 갑자기 나빠진 경기 탓일 수도. 북스피어와 판타스틱은 엄연히 법인이 다르기 때문에 저도 정확한 사정은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은, 모르는 얘기 말고 아는 얘기만 하겠습니다. <판타스티>이 복간(?)되었습니다. 맞아요. 저는 지금 계간 <판타스틱>의 두툼한 페이지를 살랑살랑 넘기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길고 어려운 여행에서 돌아왔기 때문인지 할 말이 많이 보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저택에 대한 취재며 울리치와 젤라즈니의 소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권교정 작가의 만화도 여전합니다. ‘한국 최초의 본격 추리소설가 김내성 탄생 백주년 기념’에 공을 엄청 들인 모양인데, 특집에 실린 전봉관 선생의 글이 눈에 띕니다. 와, 반가워라.

평론가 김현 선생이 그랬던가요. 뛰어난 수준의 쇼는 엉터리 발레보다 예술적이며, 뛰어난 수준의 만화는 사이비 그림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법이라고요. “뛰어난 수준의 쇼”와 “뛰어난 수준의 만화”를 앞으로도 계속 보여주기를. 꼬박꼬박 사서 볼 테니까. 또 중간에 쉬게 되면 곤란해요. 없으니, 되게 외롭더라구. (아, 저 말고 저희 출판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