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from 편집 일기 2009/04/22 13:18

(아래, '저기'님의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댓글로 달까 하다가 글이 길어지는 바람에 따로 올립니다.)

악 인쇄를 마친 <퍼언 연대기>를 받아들던 7월의 어느날, 그날의 가슴 뻐근했던 기분을 아직 기억합니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 저녁이었습니다. 기쁨이었다고 할까 감동이었고 할까. 제 손으로 만들어놓고도, 도저히 제 손으로 만들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가슴 벅찼었지요. 너무 넓고, 너무 커서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그리고 의미도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감정이 비참함으로 바뀌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더군요. 시장에 던져진 <퍼언 연대기>는 전혀 독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했습니다. 팔천오백만 원 가까이 들어간 제작비는 고스란히 부채가 되었고,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책은 파주의 창고 한켠에 쌓인 채 방치되었습니다. 달랑 두 명뿐이었던 출판사는 금세 어려워졌고, 회복하기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습니다.

최근 들어 각 인터넷 서점에서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반값 할인이라는 명목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이와 같은 ‘제살 깎아 먹기’식 할인이 가져올 폐단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무엇보다 제값을 주고 책을 산 독자들이 느낄 배신감이 저는 가장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언 연대기>의 할인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판매된 <퍼언 연대기>는 불과 수십 권. 창고에 남아 있는 수천 권의 책은 그 자체로도 문제였지만 그 책으로 인해 발생하는 보관비용도 엄청난 부담이 되어 매달 출판사를 압박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가 가진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덤핑으로 팔거나, 혹은 전량 폐기하거나.

그 후로 <퍼언 연대기>는 절판될 테고,

아마 복간될 가망성은 희박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덤핑으로 팔려고 덤빌 게 아니라

이 한몸 바쳐 유통질서가 교란되는 걸 막고 자존심을 좀 지키자는 차원에서

책을 전부 폐기해 버려야 했을까요.

출판 선진국이라는 독일에서는 정가제가 매우 잘 지켜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할인 판매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합리적인 방법으로 할인 판매도 가능하게 해 놓았습니다. 물론 이때의 할인은 전적으로 팔리지 않는 상태로 있는 책이나 반품된 책들을 저렴하게 판매함으로써 출판사의 현금유동성을 원활하게 하고 창고 부담을 줄이는 데 그 목적이 있겠지요.

이러한 할인이 가지는 미덕은, 첫째, 온전한 책을 폐지로 만들지 않을 수 있고,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환경보호와 자원절약에 일부 기여할 수 있으며, 셋째,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출판사가 스스로 책의 가치를 너무 떨어뜨린다고 생각지 않”느냐는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을까요? <퍼언 연대기>가 가진 가치는 시장에서 외면당한 그날 바로 결정되었습니다. 저희끼리 만들어 돌려보는 동인지도 아닌 마당에, ‘제값을 주고 사기엔 아까운 책’이 도대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요.

“북까페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인기가 없으면 그런 식으로 파냐고 말할 정도”라고 하셨는데, 이건 정말이지 맞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어서 맞장구를 세 번쯤 쳐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너무나도 인기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북까페 분들의 날카로운 지적에 새삼 부끄러워지는군요. 너무 부끄러워서 저는 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북스피어 도서중에 퍼언연대기 50%할인 도대체 언제까지 하는겁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라면, 현재 북스피어 창고에는 <퍼언 연대기> 세트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판의 재고 전량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있거든요. 알아보니 인터넷 서점에 있는 재고도 이제 거의 소진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시 반품이 돌아올 것이므로 언제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퍼언 연대기>가 절판의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두서없이 이렇게 쓰다 보니 문득, 화가 나신 대목이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제가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루만 싸게 판다고 해서 재빨리 구입하셨는데 여러 날 했기 때문에 화가 나신 건지, 알라딘에서만 판매한다고 해서 알라딘에서 구입하셨는데 다른 서점에서도 했기 때문에 화가 나신 건지. 이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할인은 출판사가 전적으로 결정한다기보다 서점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즉, 서점에서 매절로 가져간 물량을 미처 다 팔지 못해 서점의 자체적인 결정을 통해 여러 날 판매할 수도 있고, 한 군데 거래처에서 싸게 파는 도서에 대해 다른 거래처에서 어필을 하는 바람에 그 거래처에도 똑같은 조건으로 책을 넘길 수밖에 없기도 하지요. 아, 저는 지금 서점에게 책임을 떠넘겨 면죄부를 얻으려는 게 아닙니다. 다른 많은 출판사들도 죄다 할인 판매를 하고 있는데 왜 북스피어에게만 화를 내느냐고 억울해하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다만, 위와 같은 사정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조금쯤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뻔한 변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몇 자 적어봤습니다. 되풀이하거니와, <퍼언 연대기>는 엄청나게 많이 팔린 책을 조금이라도 더 팔기 먹기 위해서 할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책의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출판사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제값을 주고 <퍼언 연대기>를 구입하신 모든 독자분들에게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서점도, 다른 출판사도, 어느 누구도 아닌 제가 했습니다(아, 참고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대표입니다). 그럴 일이 없으면 참으로 좋겠지만, 향후 판매가 부진한 책이 생긴다면 아마 또 할인 판매를 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절대로 할인 판매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점 역시 미리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