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것을 그린다. 먼저 신비한 것을 표현하려면 신비한 것처럼 쓰면 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다다미 안에서 처녀 귀신이 머리를 내민다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굉장하다는 느낌이 없지요. 그러니까 유령을 유령으로, 요괴를 요괴로 써서는 무섭지가 않습니다. 단, 어쩐지 묘하게 괴이한 것이 나타나서 이야기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하면 으스스한 법입니다. –이즈미 교카, <괴이와 표현법>, 1909년 4월

에도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내려온 신비한 이야기들이 교고쿠 나쓰히코 등의 요즘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 작품들이 한국에도 점점 소개되어 가고, 어느새 주변에는 ‘기담’ 운운하는 작품들이 꽤 많이 모였습니다.
괴담, 기담,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저에게는 무척 기쁜 현상입니다.

그런데 근대적인 환상 문학의 시발점이 된 샘물은 누가 퍼 올린 것일까요.
스치고 지나가는 여라 작가 중에 역시 이 사람을 빼 놓고 일본의 환상 문학을 얘기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즈미 교카(泉鏡花)’.
‘거울 속 꽃’이라는 필명만큼 몽환적인 그의 작품을 우리 한번 표면이라도 구경해 봅시다.

펼쳐 놓은 잡지 속 사진은 <화조(化鳥)>의 배경이 된 다리라고 합니다.

1873년 호쿠리쿠의 아름다운 땅, 가나자와에서 태어난 교카는 괴이한 것을 사랑하고, 글을 사랑하고, 태어나 자란 가나자와를 사랑한 작가입니다. 평생 그가 지은 작품은 희곡을 포함해 삼백여 개, 그중 절반 이상이 ‘괴이한 이야기’이니 일본문학사상 가장 많은 괴담을 이야기한 작가라해도 지나치지 않겠지요.

그렇게 많은 작품이 있으니 책을 산만큼 쌓아놓고 인증샷을 찍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녀석들은 아주 소소합니다. 교카의 대표작들은 인터넷으로도 읽을 수 있어서 책은 별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거짓말 섞인 변명을 늘어놓고 싶군요.


질서정연한 글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 교카의 문장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게다가 교카의 소설은 줄거리만 이야기하자면 참 싱겁죠. 그래서 뭐?라고 반문하게 되는 뻔한 이야기이고, 실제로 괴담이니 오싹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본다면 무척 허탈해질 겁니다.
지난 번에 ‘와비사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잡담을 늘어놓았지만, 실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어요. 일본 하면 엄청나게 잔인하고 외설스러울 거란 이미지가 어째서인지 있지만 사실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파고들면 고요함이 있다는 거지요. 무사의 문화이니 잔인한 것도 많고, 원래 성적인 부분은 한국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한국인이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개방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맛은 짜지만 싱거운 일본 음식처럼 강렬함보다는 밋밋함이 있어요. 괴담도 그렇죠. 사실은 꽤 ‘쓸쓸한’ 이야기가 많답니다.
교카가 그리는 괴담의 ‘쓸쓸함’은 여자(어머니)의 강인하지만 부드러운 ‘아름다움’으로 드러납니다.

교카의 작품을 읽다 보면 때때로 정말 남자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여성을 아름답게 표현하곤 합니다. 남성적인 욕망이 드러난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가 아닌,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요.
그가 여성의 이야기를 많이 쓴 것은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이라고도 하지요.

복잡 기괴해 보이는 문장도 눈이 아니라 소리로 읽으면 사뭇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현대의 문학이 눈으로 쫓아가기 편하다면, 그 시절의 문학은 소리로 따르기가 좋지요. 글로써는 정돈감이 2% 부족해도, 입으로 소리를 내면 그 가락이 도저히 현대인들의 굳어버린 언어감각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쾌함이 있습니다. 이즈미 교카의 작품이 소설보다 연극이나 영화로 더 친숙한 까닭도 밋밋한 활자가 아닌 입체적이 되었을 때 더 아름답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품은 <화조>와 <해신 별장>인데요.

<화조>는 어머니와 함께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받으며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소년에게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재밌다, 야아 재밌다. 날씨가 좋지 않아 바깥에 나가 놀 수 없지만 괜찮아. 빗속에 추적추적 젖어서는 삿갓을 쓰고 볏짚을 두른 모습으로  다리를 건너는 것은 멧돼지다

비내리는 날 바깥에도 놀러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 다리 위를 구경하는 소년의 천진한 시선이 귀엽기도 우습기도 합니다. 몇달 전, 다리에 매어 있는 원숭이를 놀리다가 강에 빠진 소년을 누군가가 구합니다. 어머니는 날개가 달린 아름다운 여자가 소년을 구했다고 합니다. 날개 달린 아름다운 누나를 만나고 싶어서 숲 속에 들어갔다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소년을 꽉 끌어안아 준 것은 어머니입니다.

비도 그쳐 마침 돌바닥도 미끌미끌 할 테지. 엄마는 그리 말씀하셨지만 일부러 원숭이와 부딪혀 다시 강에 떨어져 볼까. 그러면 또 나를 구해줄까. 보고 싶어라! 날개 달린 아름다운 누나. 하지만 됐어. 엄마가 계신걸, 엄마가 늘 곁에 계신걸.

<해신 별장>은 희곡입니다. 사실 <야샤가이케>나 <천수각 이야기>만큼 인정받은 작품은 아니지만, 저는 이 작품도 두 작품 못지 않게 멋졌습니다.

아버지는 바다의 신에게 딸을 제물로 바치고 자신의 부와 욕심을 채웁니다.
바닷속에 가라앉은 아리따운 아가씨는 바다 신의 아내로 맞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용과 같은 무시무사한 힘을 가진 남자가 두렵고 고향이 그립고, 무엇보다 자신이 이 새로운 세계에서 얻은 아름다운 보석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지요. 남자는 그런 그녀를 말리지 않지만, 바다에 떨어진 그녀는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뱀입니다. 자신을 보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에 비탄에 잠긴 그녀에게 화가난 남자는 그녀를 처형하라 명합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숨을 거두려는 남자의 올곧음에 여자가 깨닫는 마지막 장면은 극적이고 로맨틱하지요.

아가씨    : 당신, 이런 사악한 물고기의 송곳니는 싫습니다.
    비겁하게 보지만 마시고 그 손으로 저를 해하시지요.
    (공자,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고겨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다)
    아아, 당신. 나를 베고, 나를 죽일 당신의 티없는 얼굴, 고고함, 아름다움, 맑은 눈매, 용맹한 어깨.
    처음 보았습니다, 이렇게나 고귀하고 우아한 모습.
    이제 고향 따위 잊었습니다. 어서 죽여 주세요. 아아, 기쁩니다.

(중략)

아가씨    : 한 걸음 걸으면 꽃이 내리고, 두 걸음 걸으면 그윽한 향기 피어오르고,
    지금 세 번째 걸음을 내딛으려 하니 아름다운 음악이 들립니다. 여기는 극락인가요.
공자    : 하하하, 그런 곳과 같은 취급 마라.
    여자가 가는 극락에 남자는 없다. 남자가 가는 극락에 여자는 없다.

평이하게 가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낭떠러지로 뚝 떨어지는 이야기가 교카의 특징이자 매력입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럽지만, 두 개, 세 개 작품을 읽다 보면 '뚝 떨어지는 쾌감'이 온몸을 전율시킵니다.



왼쪽부터 <꿈 그리고 환상>, <교카몽환>(<꿈 그리고 환상>의 원서), <외과실>
교카의 작품들 답게 아름답고 은근한 요기를 풍기는 미인이 표지를 장식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여하튼 제가 이렇게 아름답다, 좋다고 말해도 읽을 책이 없으면 말이 안 됩니다.
기쁘게도 생각의 나무에서 ‘기담문학 고딕 총서’ 7번째 작품으로 이즈미 교카의 단편집 <외과실>을 내 주었습니다. 현재 이즈미 교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 되겠습니다. 몇 년 전에 하쓰 아키코가 교카의 대표적은 세 희곡을 만화화한 <교카 몽환>이 <꿈 그리고 환상>이라는 멋진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되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하쓰 아키코의 만화는 참으로 요염해서 좋아합니다. ‘예쁜’ 그림은 아니지만 아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지요. 이만큼 일본적인 아름다움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만화가는 드물다고 생각해요. 그런 아키코 여사가 그린 교카의 작품은 상상했던 그대로라 몇 번을 읽어도 숨이 막힙니다. 기회가 되시면 이 만화책도 꼭 한 번 손에 들어 보셔요. 글보다는 이쪽이 교카의 세계에 들어서기는 좋을 것 같습니다.


<외과실>을 읽다 보면,

낯익은 것들이 나와 주어 반가움을 더합니다. -^-




이즈미 교카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73에는 ‘이즈미 교카 상’이 제정되기도 했는데요. 수상작 중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문라이트 섀도우>(<키친>에 수록), 유미리의 <풀 하우스>, 교고쿠 나쓰히코의 <웃는 이에몬>, 야마다 에이미의 <애니멀 로직> 등이 있습니다.

‘문호 괴담 걸작선’ 시리즈를 선보이며 저를 기쁘게 해 주고 있는 지쿠마쇼보에서 7월에는 특별편으로 <교카 햐쿠모노가타리>가 나온다고 하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습니다. 햐쿠모노가타리라는 말에 맞게, 실은 소설집이 아니라 ‘괴담 황금기’라고도 불리는 다이쇼 시대(1912~1926) 작가들의 육성을 모은 앤솔러지라고 합니다.
(*햐쿠모노가타리 ; 직역하면 ‘백 가지 이야기’. 괴담 백 가지를 들으면 목숨을 잃는다는 이야기가 예부터 일본에는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햐쿠모노가타리’=괴담, 무서운 이야기를 나타내는 명사로 쓰입니다)

●얼마 전 지인이 <교카 요괴 비첩(鏡花あやかし秘帖)>이라는 오디오 드라마의 리뷰를 올린 것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수상한 제목(<나츠메 우인장>도 아니고…), 게다가 자켓 그림이 이마 이치코, 주인공 캐스팅이 스와베와 스즈(이렇게 쓰면 아는 분만 아시겠지만, 여하튼 유명 성우^^;). 저는 순간 설마 이즈미 교카의 작품을 보이즈가 러브한 이야기로 고쳐 쓴 건 아니겠지, 하고 덜컹했습니다. 다행히 아니었습니다. 교카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 아니라 이즈미 교카 본인을 가지고 지은 이야기라고 합니다(땀 뻘뻘).
다치바나 미레이라는 라이트 노벨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메이지 시대 환상 소설 작가 교카와 그의 담당 기자가 겪는 괴이한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하는데, 일본 소설은 소재가 다양하다고들 하지만 정말 이야기로 못 만드는 소재가 없군요^^; 장르는 다행히 본격 연애물은 아닌 듯하고(저는 선천적으로 연애물 알레르기를 가지고 태어난 비운의 여자입니다) 흥미가 동하는 소재라서 한번 읽어 보고(들어 보고) 싶습니다.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30%정도 더 강합니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글을 배웠고,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란 도쿠다 슈세이와는 문학적인 방향도 달랐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사실 저는 도쿠다 슈세이의 글도 좋아합니다. 교카와는 달리 처음부터 잘 읽히고 말이죠(웃음).

-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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