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 몇 년쯤 지난 일이다. 어느 날 나는 끝내주게 재미있는 외서 하나를 ‘발견’했다. 편의상 그 작품을 A라고 하자. 친하게 지내던 기획자가 건네준 원고였는데, 절반 정도를 읽었을 때 이미 A를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은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날 바로 에이전시에 오퍼를 넣었다.

그때 내가 제시한 선인세는 한화로 300만원이 조금 안 됐던 걸로 기억한다. 통상적인 수준의 금액이었고 무난하게 계약이 성사될 줄 알았다. 객관적인 상황으로 봐서 도저히 경쟁이 붙는다거나 무리한 선인세를 요구할 만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이전시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경쟁이 붙었으니 ‘베스트 오퍼’를 넣으란다. 환장한다.

(여기서 ‘객관적인 상황’이라는 부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란 약간 곤란한데, 음, 우리는 결국 A를 계약하지 못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다른 출판사에서 우리가 제시한 금액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번역 출판권을 가져갔다고 들었다. 때문에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자칫 작품명이 밝혀지면 해당 출판사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나는 단순히 우리보다 더 높은 선인세를 제시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출판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베스트 오퍼, 즉 선인세를 올려서 다시 넣으란 소리다. 너네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를 불러보아요. 다른 출판사들이 얼마에 넣었는지는 모르는 상황이고.

해당 에이전시는 A를 출간한 해외 출판사와 ‘독점’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다른 경로(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출간을 타진할 여지도 없었다. 석연찮은 기분도 들고 찜찜하기도 했던 나는 상징적인 의미로 딱 10만원만 올려 다시 오퍼를 넣었다. 욕심은 나지만 안 되면 할 수 없다, 세계는 넓고 낼 책은 많으니까, 그런 기분도 조금쯤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우리는 처음부터 외서 계약에 대한 원칙이 있었다. 올리란다고 올리고 더 올리란다고 마냥 더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긴 나 역시 뭣도 모르고 달란 대로 다 줘야 되나 보다 싶어서 끙끙 앓던 때가 있기는 했지만.

당연히, 우리는 A를 계약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십 년쯤 전에 모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바로 절판된 책(은 편의상 B라고 하자)을 우리가 새로 계약하려고 하자 어느새 바람처럼 나타난 몇 군데 출판사와 B를 놓고 경쟁이 붙었던 기억도 난다.

공교롭다면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간도 아닌 마당에 오륙년 동안 잠잠하던 B에 어째서 하필 딱 그때 경쟁이 붙었을까. B가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그 기간에 B에 대한 소문이 돌았던 것도 아닌데 왜. 대관절 어째서.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그 출판사들도 오랫동안 기획해 왔던 거일 수도 있다. 내가 생떼를 쓰는 거일 수도 있다. 지 안목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지네가 계약만 하려고 하면 경쟁이 붙느냐며 혀를 끌끌 찰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동안은 거론하지 않았다. 허세를 부리려는 것처럼 보이고, 공연한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끼적이는 이유는, 어떤 책을 읽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책인고 하니, ‘팝헙 에이전시’의 대표이자 번역기획자로도 유명한 강주헌 씨의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라는 책이다. 그동안 강주헌 씨는 좋은 번역자이자 탁월한 기획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양반 확 그냥 존경해 버릴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예컨대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에이전트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대리인’에 가장 가깝다. 달리 말하면 해외 출판사를 대신해서 저작권을 팔아주고 관리해주는 대리인인 셈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보험대리인과 달리 독점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된다. 쉽게 말해서 좋은 값을 주는 소비자를 골라서 팔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소비자들을 모아놓고 경쟁을 붙인다. 심하게 말하면 ‘떴다방’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보다 더한 경우에 대한 소문도 떠돈다. 출판사에서 열심히 책을 찾아서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와 독점관계를 맺고 있는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저작권 확인을 부탁하면, 그 에이전시가 더 좋은 값을 제시하는 출판사를 물색해서 번역 저작권을 넘기는 파렴치한 행위를 한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천인공노할 짓이다. 이것도 독점의 폐해다.

  
현직 에이전시 대표가 굳이 ‘소문’이라는 용어까지 에둘러 써가며 동종업계에 대해 날린 뼈아픈 일침이다. “출판사에서 열심히 책을 찾아서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와 독점관계를 맺고 있는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저작권 확인을 부탁하면, 그 에이전시가 더 좋은 값을 제시하는 출판사를 물색해서 번역 저작권을 넘기는 파렴치한 행위를 한다는 소문도 들려온다”는 바로 이 대목.

마치 내가 겪은 사례를 토대로 쓴 문장이 아닐까 싶은 만큼, 똑같다. 나는 강주헌 씨가 백퍼센트 사실을 토대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내부고발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약간이라도 과장의 여지가 있거나 정말로 소문에 불과할 따름이라면 결코 이렇게까지 쓸 수는 없었으리라 본다.

외서 계약에 대한 추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느새 위험수위를 넘어 버렸다. 그렇다면 사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제동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동종업계 종사자들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하겠다.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런 만큼 에이전트로서 그가 가진 신념은 확실하다.

에이전트는 해외 출판사의 대리인이다. 따라서 해외 출판사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이 존재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인세를 많이 받아주는 것만이 해외 출판사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출판사에게 적정한 가격의 선인세를 요구하고 그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을 해외 출판사에 안겨준다. 물론 에이전시는 우리나라 출판사가 정직하게 인세보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일 뿐이다. 오히려 에이전트로서의 진정한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단방에 크게 먹고 끝내자는 심보와 다를 바 없다.


척 보기에도 간지가 절절 흐르는 신념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담긴 강주헌 씨의 신념이랄까 생각이랄까 하는 부분도 훌륭하다고 여겼지만, 그보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용기 있게 밝힌 그 부분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책까지 냈으니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강주헌 씨가 나서서 경쟁을 조장하고 금액을 높여서 문제를 만들지 못할 거라는 얘기다.

실은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오바하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나에게도, 심정적으로는 억만금을 주고 싶을 정도로 반드시 잡고 싶은 타이틀이 생길 게다. 게다가 만약 자금도 충분하다면. 그렇다면…… 이번 한 번만 폭주해 볼까. 1억이든 10억이든 질러볼까.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꼭 지금의 다짐을 기억해 두자. 공개적으로 잘난 척은 다 해놓았으니, 쪽팔리는 일은 하지 말자. 내가 잡고 싶은 책이라면 다른 누군가도 잡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어쨌든 누군가가 잘 만들어서 우리 독자들이 읽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강주헌 씨의 신념은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고 기본이라면 기본이다. 하지만 당연하고 기본적인 이 생각이 유난히 돋보이고 ‘누구누구가 좀 봤으면 좋겠다’ 싶은 기분에 침까지 튀겨가며 내가 떠들어대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북스피어 포함해서)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아니아니, 역시 싸잡아 비난하는 일은 관두자.


어쨌든.

혹자는 이렇게 대꾸할지 모른다. 작금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아 내 돈 내고 내가 계약하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냐고. 뭐 굳이 그렇게 생각하시겠다면 그 말씀에도 일리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실제로 꽤 많은 이들이 그런 자세일 거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국제 출판시장의 호구” 운운하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한국 출판계의 이런 행태는 급기야 ‘선인세 100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문학수첩이 6월경 출간할 예정인 댄 브라운의 신작 ‘솔로몬의 열쇠’(가제)의 선인세로 100만 달러를 지급한 것이다. 해외 번역서에 대한 선인세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2만 달러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2000년대 들어 10만 달러, 20만 달러가 우습게 여겨지더니 지난해 ‘마지막 강의’의 64만 달러에 이어100만 달러까지 왔다”면서 “해외 작품에 선인세 10만 달러 이상은 안 주는 것을 불문율로 여기고 지키는 일본 출판계와 비교된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선 해외 번역서에 대한 의존이 커지면서 ‘국제 출판시장의 호구(虎口)’로 전락한 한국 출판계의 처지가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_동아일보/ 2009년 1월 22일/ 금동근 기자


계약금 자체가 상승해 버리는 여타 출판사들의 어려움은 거론하지 않더라도, 높은 선인세를 감당하기 위해 출판사가 말도 안 되게 분권을 하여 세계에서 “대한민국 독자가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읽는 셈”이 되어 버린다든가, 선인세를 건지기 위해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몰두하다가 사재기로 딱 걸려버리는 사례들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도한다. 

후져. 아아 정말이지 후지다. 적당히 자존심도 좀 찾아가면서 출판도 하면 좋을 텐데. 허긴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대답하신다면 이건 뭐 대꾸할 말이 없긴 하지만.

덧)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가 발행 12일 만에 100만 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그 기간 서점에서는 품절 현상이 끊이지 않았고 『1Q84』에 인용된 책과 음악 CD까지 더불어 호황을 누렸다고 하니 가히 ‘무라카미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현해탄을 건너온 이 책은 또 다른 이유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미 대부분의 독자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바로 선인세 때문이다.

『1Q84』는 대여섯 개의 메이저 출판사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10억을 제시한 출판사가 경쟁에서 밀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보도를 보니 한때 14억쯤 되리라 추정되던 선인세는 최종적으로 10억원에 못 미치는 금액(정확한 액수는 기업비밀이라고 한다. 참고로 북스피어에서 계약한 작품 가운데 최고 선인세는 610만원이다. 우리야 뭐 비밀도 뭣도 아니니까)에 문학동네로 ‘낙찰’된 모양이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매체들이 어처구니없이 높은 선인세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굳이 여기서 한자락 보내봐야 그다지 의미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매체들의 앞다툰 보도는 전혀 호들갑이 아니다. 왜냐. 선인세로 10억 가까이 지불했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잘못됐다기보다 부끄럽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이게 어째서 부끄러운 일인지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조차 없겠다. 비용을 지불한 출판사 스스로가 쉬쉬하며 뭉개고 넘어가려는 판이니까.

그렇다면 왜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모르겠는데ㅎㅎ, 혹시 아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