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일전에 내 아우가 어떤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은 번역을 아주 잘한 것 같아.” 무슨 책을 읽고 그러나 싶어 봤더니 북스피어에서 나온 일본 번역소설이다. 우리 책을 칭찬하는 거니까 일단 기분이 좋긴 했는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가 궁금했다. “응,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읽히더라구.”
사례 2
공교롭게도 며칠 후, 똑같은 책을 두고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은 번역이 좀 별로인 것 같아.” 번역이 별로라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도통 안 읽혀.” 잘 안 읽히는 이유가 번역이 별로이기 때문이라는 소리다. 재차 물었지만 딱히 다른 이유는 듣지 못했다.
비단 일본 번역소설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번역소설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냉정한’ 평가가 눈에 띄게 늘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왜 그렇게 평가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상세히 밝혀놓아서 역자와 출판사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가타부타 평가도 없이 덮어놓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지적하는 독자들도 의외로 많다.
나는 이러한 평가가 직역과 의역에 대한 독자들의 ‘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주지하다시피 “원어에 충실”할 것인가, “번역어에 충실”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묵은 논쟁거리이고 여전히 진행중이며 앞으로도 딱 부러진 결론이 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많은 번역자들과 편집자들은 대개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면서도, 끝없이 고민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고민에 대해 이희재 씨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음부터 나는 포부가 컸다. 원문에 충실하되 한국어로서도 자연스러운 그런 번역을 하고 싶었다. 결코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다. 원문에만 얽매이는 직역이 ‘낮은 포복’이고 원문보다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중시하는 의역이 ‘고공 비행’이라면 나는 아슬아슬한 ‘저공 비행’이 좋다고 생각했다. 원문의 결을 어떻게든 번역문에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원문에 가장 가까운 표현을 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니 한국어의 구석구석을 보통 사람들보다는 자세히 들여다본 것도 같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 작가가 되어 한국어 자체만을 놓고 씨름했더라면 한국어의 개성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 일본어, 독일어 같은 외국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다 보니 한국어의 남다른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했던 한국어답다는 개념이 차츰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어가 이미 번역서를 통해 영어와 일본어에 상당히 깊이 물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번역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때부터 조금씩 바뀌었다. 이미 외국어에 많이 물든 한국어에 외국어 문체의 흔적을 더 남기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원문에서 멀어지는 고공 비행의 길로 날아올랐다.
_『번역의 탄생』/ 이희재 지음/ 교양인/ 2009년 2월
해당 문장의 앞뒤로 왜 저자가 직역에서 의역으로 비행방식을 바꾸었는지에 대한 근거와 과정 등이 적혀 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엄청나게 고민했을 터이고, 쓰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으리라. 저자도 밝혔다시피 정답이 없는데다 미묘하고 껄끄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미묘하고 껄끄러운가를 얘기해보고 싶지만 역시 미묘하고 껄끄러운 문제이니 만큼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권의 책을 두고 상반된 평가를 내린 두 사람의 사례에서 눈에 띄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둘 다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원어를 모르면서 번역의 질을 지적한 두 사람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두 사람의 ‘감상’이 번역 방식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례에서 예로 든 책에 오역이 없다는 걸 전제로 유추해 보자면, 이건 직역이나 의역의 문제라기보다 흔히 간과하기 쉬운 번역투의 문제가 아닐까. 두 사람은 문장의 좋고 나쁨(도 주관적인 판단이다), 혹은 문체의 호불호(특히 일본 번역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유의 표현 자체를 못 견뎌한다거나)를 번역의 문제로 규정해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문장의 질도 번역에 포함된다. 엄밀히 말하지 않아도 포함되겠지만.
‘번역투’라는 어정쩡한 단어를 써버리고 말았는데, 예컨대 복문이나 수동태, 입말의 문어체 등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굳이 번역어뿐 아니라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도 가급적 피하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사례로 든 두 사람의 ‘번역이 나쁘(좋)다’는 표현은 틀렸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오해의 소지가 남는다.
대체로 독자보다 ‘약간’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편집자들(요즘에는 워낙 편집자 수준으로 실수를 지적해내는 독자들이 많으니까)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이것은 ‘교정ㆍ교열(도 물론 번역의 속한다)’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번역원고의 교정ㆍ교열 작업을 할 때 맞닥뜨리는 고민들도 이른바 ‘번역투’의 문장들을 어느 선까지 고쳐야 하는가부터 시작된다.
이때의 ‘어느 선’이라는 부분 역시 미묘한데 마침 안정효 선생이 『글쓰기 만보』(안정효 지음/ 모멘토/ 2006년 8월)에 잘 정리해 놓았기에 몇몇 대목을 옮겨본다. 다시 말하거니와 아래 인용한 대목들은 눈여겨봐 두면 일반적인 글쓰기에도 틀림없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제목은 임의로 정했고, 번호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1. ~것, 있다, 수
번역을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에게 처음 몇 달 동안 그들이 써놓은 글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라는 단어를 모조리 없애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킨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 세 단어를 문장에서 너무 자주 사용한다. 믿어지지 않으면 지금까지 써놓은 일기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에 모두 빨간 줄을 쳐보기 바란다. 자신이 쓴 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쓴 비소설류의 모든 글이 비슷한 지경이다.
‘있다’만 솎아내더라도 오히려 문장이 간결해져서 힘이 생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장을 다듬을 만한 자신감과 용기가 없어서, 긴 문장이 유식하다는 착각에 빠져, ‘간다’를 ‘가고 있다’라고만 해서도 안심하지 못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까지 한다.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표현을 놓고 생각해보자. ‘있다’는 맹장을 잘라내거나 썩은 이를 뽑듯이 그냥 없애버리면 된다. 그러면 “집으로 왔던 것이다”가 된다. 그리고 ‘것’도 가차 없이 자르고는 “집으로 왔다‘라고만 하더라도 작품 전체의 흐름에도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것’을 고치라 하면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것’이라는 단어를 ‘일’ 따위의 다른 단어로 바꾸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니까 나무를 가꾸면서 잎사귀만 어루만지는 격이다. 정원을 가꾸려면 때로는 나무를 통째로 뽑아버리고 새 나무를 심기도 한다. 문장의 나무도 마찬가지다. 수북하게 매달린 단어 잎사귀들 가운데 시들고 말라죽은 잎이 많으면, 아예 그 나무를 바꿔 심어야 한다. 그러니까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에서 ‘있다’와 ‘것’이라는 두 단어 잎사귀만 다른 단어로 바꿔 넣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아예 문장을 새로 쓰라는 얘기다.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라고 말이다. (혹은) “몸에 좋은 것이 시장에서 잘 팔린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는 ‘것’을 다른 단어로 바꿔 넣는 차원에서 머무르지 말고, “몸에 좋다 하면 무엇이나 다 잘 팔린다”라고 문장 전체를 아예 새로 쓰라는 뜻이다.
‘있다’와 ‘것’과 더불어 ‘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쓰기에서 ‘3적(敵)’으로 꼽힌다. “누전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라거나 “광우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영어에 중독된 귀에 자칫 ‘can'으로 들리는 이런 표현은 “누전을 일으키기도 합니다”라거나 “광우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라는 식으로 표현을 다양화하면, 우리 말 같지 않은 어색함이 사라지고 훨씬 자연스럽게 들린다.
나는 글쓰기를 하면,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읽어보고는, 중복된 어미와 토씨를 일일이 걸러내어 고쳐놓는다. 예를 들면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에게서”라는 문장을 보자. ‘직장에서’와 ‘동료에게서’의 중복된 어미가 눈에 거슬린다. 그래서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로부터”라고 고쳐놓았다.
또 어미가 중복될 때마다 “나는 가는 길에”를 “나는 가던 길에”로, “좋은 사람은”을 “훌륭한 사람은”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고”는 “그렇게 말하고 싶으며”로, “그러는 너희는 누구냐”는 “너희들 왜 그러느냐”로, “그러니까 어떨까”는 “그러니까 어떨지”로, “그래서 가서 보니”는 “그래서 가봤더니”라는 식으로 표현을 바꿔가며 변화를 준다. 그러면 단순히 이어지는 어미만 달라지지 않고 문장 전체의 획일적인 양상이 다채로워지면서 답답한 문장에 숨통이 트여 싱싱한 기운이 생겨난다.
“우리 제품은 확연히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아무리 봐도 그런 어정쩡한 ‘확연한 차이’를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지 어쩐지는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힘을 빼는 어법은 주체성과 자신감의 결핍 상태를 보여준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나'를 내세우지 않으려는 한국인의 겸손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수동태여서 요즈음 가장 귀에 거슬리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뉴스보도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 “~라고 조사되었습니다”이다. ‘조사되었다’는 ‘조사해본 결과 ~한 사실이 밝혀졌다“라는 표현을 컴퓨터 언어로 기호화한 단어이다. 과거에는 이런 문장을 ”~라고 당국은 밝혔다“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사회적인 집단 정서와 언어문화가 여성화하기 시작하면서 선언적 책임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점점 모호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45년 전 대학생이던 시절 처음 영어로 창작 공부를 시작한 무렵에 나는 루돌프 플레시의 『잘 읽히는 글쓰기』에서 정말로 놀랍고도 기막힌 교훈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이 써놓은 글에서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모조리 제거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고는 ‘그래서’와 ‘하지만’ 역시 제거하라고 했다. 막히기는커녕 오히려 청소를 끝낸 하수구처럼 모든 문장이 맑은 물소리를 내며 잘 흐르리라는 얘기였다.
덧) 그렇다면 과연 원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떤 책을 읽고 ‘번역이 나쁘(좋)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가 안 온당한가. 음,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