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글을 읽다가 공감했던 내용이 있어, 메모해둔다.
영화평론을 읽을 때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관찰력과 감식안에 절망을 느끼는 영화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영화평론가들의 글을 보면서 늘 "이 사람이 본 것을 나는 왜 못 봤을까" 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화 관객에게 지적 위화감을 주고 나아가 자신의 지능까지 의심하게 하는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들의 글은, 그들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게 되기까지의 온갖 자질구레한 과정과 준비 과정을 비밀에 부치고 있기 때문에 부정직한 글이다.
영화평론가를 위한 입문서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영화를 다섯 번 이상은 보아야 한다고 못박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사실을 알 경우 "이 사람은 다섯 번을 봤으니까" 하고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 지적 능력이나 지능지수를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영화평론가가 일반적인 관객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비법은 물론 "다섯 번 이상"이 기본인 준비 과정에만 있지 않다. 오랫동안 영화를 공부해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들은 제작 현장을 방문할 수 있고 제작자와 감독, 작가, 스태프 등과 작품에 대해 캐물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기술 시사회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다.
하므로 나같이 지적 열등감에 시달리는 일반 관객을 위해, 영화평론의 마지막 문장을 항상 이렇게 끝맺는 게 어떨까?:"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영화를 다섯 번 보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혹은 좀더 자세히:"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세 번이나 개봉관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아니면 이렇게:"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여러 차례 촬영 현장을 방문하였고 감독(실명)과 중요 배우(실명), 스태프(실명)는 물론 제작자(실명)와도 상당히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깝게도 편집 현장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기술 시사회에는 참관할 수 있었고 그 뒤에 네 번이나 이 영화를 더 보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영화의 전문가인 사무엘 베기파스 씨와의 의견교환이 이 영화를 보는 나의 시각을 한층 풍부히 했다는 것도 적어둔다"
평론의 끄트머리에 이렇게 쓰는 일이, 영화평론가들의 자유로운 글쓰기를 전혀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책의 서문이 으레 이렇게 끝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이 책의 초고를 보고 쾌히 토론의 상대가 되어 주신 아무개 아무개 씨와, 새로운 자료와 의견을 내어 주신 아무개 씨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모든 허물은 전적으로 필자의 몫이다."
문화 속에 관례화된 관용어법이 많고 또 그것의 강제가 심할수록 그 문화는 고루한 정체 속에 질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관례화된 관용어법이 오히려 섬세한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위에 제시된 비평상의 관용어법은 일반인이 전문가에 대해 느끼는 턱없는 신비를 없애줄 뿐 아니라, 혹시 영화를 한 번만 보고 여러 번 본 듯이 글을 쓰는 불성실한 평론가의 잘못된 버릇도 교정해 주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의 제목은 '섬세'다.
영화평론을 읽을 때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관찰력과 감식안에 절망을 느끼는 영화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영화평론가들의 글을 보면서 늘 "이 사람이 본 것을 나는 왜 못 봤을까" 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화 관객에게 지적 위화감을 주고 나아가 자신의 지능까지 의심하게 하는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들의 글은, 그들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게 되기까지의 온갖 자질구레한 과정과 준비 과정을 비밀에 부치고 있기 때문에 부정직한 글이다.
영화평론가를 위한 입문서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영화를 다섯 번 이상은 보아야 한다고 못박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사실을 알 경우 "이 사람은 다섯 번을 봤으니까" 하고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 지적 능력이나 지능지수를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영화평론가가 일반적인 관객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비법은 물론 "다섯 번 이상"이 기본인 준비 과정에만 있지 않다. 오랫동안 영화를 공부해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들은 제작 현장을 방문할 수 있고 제작자와 감독, 작가, 스태프 등과 작품에 대해 캐물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기술 시사회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다.
하므로 나같이 지적 열등감에 시달리는 일반 관객을 위해, 영화평론의 마지막 문장을 항상 이렇게 끝맺는 게 어떨까?:"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영화를 다섯 번 보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혹은 좀더 자세히:"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세 번이나 개봉관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아니면 이렇게:"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여러 차례 촬영 현장을 방문하였고 감독(실명)과 중요 배우(실명), 스태프(실명)는 물론 제작자(실명)와도 상당히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깝게도 편집 현장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기술 시사회에는 참관할 수 있었고 그 뒤에 네 번이나 이 영화를 더 보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영화의 전문가인 사무엘 베기파스 씨와의 의견교환이 이 영화를 보는 나의 시각을 한층 풍부히 했다는 것도 적어둔다"
평론의 끄트머리에 이렇게 쓰는 일이, 영화평론가들의 자유로운 글쓰기를 전혀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책의 서문이 으레 이렇게 끝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이 책의 초고를 보고 쾌히 토론의 상대가 되어 주신 아무개 아무개 씨와, 새로운 자료와 의견을 내어 주신 아무개 씨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모든 허물은 전적으로 필자의 몫이다."
문화 속에 관례화된 관용어법이 많고 또 그것의 강제가 심할수록 그 문화는 고루한 정체 속에 질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관례화된 관용어법이 오히려 섬세한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위에 제시된 비평상의 관용어법은 일반인이 전문가에 대해 느끼는 턱없는 신비를 없애줄 뿐 아니라, 혹시 영화를 한 번만 보고 여러 번 본 듯이 글을 쓰는 불성실한 평론가의 잘못된 버릇도 교정해 주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의 제목은 '섬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