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사랑을 받고만 싶어 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어째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원망했다. 남자들은 알고 있을까. 페니스를 밀어넣는 그 관 끝에 깊은 방이 있다는 것을. 검붉은, 고름과 같은 피로 가득 차, 미지의 생물처럼 섬뜩하게 꿈틀거리는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그런 섬뜩한 생물을 뱃속에 길러야 하는 이 불운을.”

야마모토 후미오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이렇게 잘 쓰는 작가가 왜 한국에서는 안 팔리는 걸까. 로맨스 소설이야 전통적으로 팔리는 장르고, 아니 게다가 한국의 “대형서점 매대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일본 소설들로 뒤발되어” 있다는데. 혹시 미스터리나 판타지는 내줘도 로맨스만큼은 곤란하다는 심보로 언론과 서점이 짜고 전혀 노출을 안 시켜 주는 게 아닐지……라는 건 물론 웃자고 해 본 소리다. 이런 고약한 상상은 접어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짚이는 게 하나 있긴 하다. 여타의 로맨스 소설 작가들이 사랑을 주는 듯한 포즈를 취하면서 실은 사랑받기 위해 쓰는 데(그래야 팔리는데) 비해, 이 작가는 딱 그 반대로 쓰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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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한희선 옮김

내가 읽은 그녀의 소설들은 대부분 이 수상한 세상과 홀로 맞서는 여성들의 냉소적인 독백이었다. 예컨대 『슈거리스 러브』에서 야마모토 후미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추하거나 약하거나 쓸모없는 것은 매장된다. 그 원인이 뭐든 간에. 그것이 도태다. 그녀는 결코 도태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틀림없다. 다리를 손질할 것,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를 훑어볼 것, 지방을 쌓아두지 않을 것, 동성에게도, 이성에게도 매력적인 여성이 될 것. 나도 그렇게 해온 것이다. 장난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승자일까. 그 싸움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평론가 김영찬의 문장을 슬쩍 빌려 말하자면, 로맨스라는 외양을 하곤 있으나 여성에 대한 세상의 이중적인 폭력(“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 대해 되새기게 하는 자의식적 소설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소설은 말랑말랑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여성 독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팔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성 독자들은 어떨까. 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를 포함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건 “적당히 지적이지만 남성의 언어에 도전하지 않고, 거칠고 험악한 노동 시장에 진출할 필요, 의지가 없으며, 남자에게 부담주지 않을 만큼만 의존적인, 깨끗한 손톱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니까, 『슈거리스 러브』에 등장하는, 뚱한 표정으로 하나같이 아파 보이는 열 명의 여성들은 관심 밖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또 무슨 페미니즘 소설이 아닌가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혹은, 여성을 구원한다니……, 틀림없이 작가도 당치 않은 얘기라며 화를 낼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집어들 기회가 생겼다면 챕터의 맨 앞에 나오는 병명은 건너뛰시길 바란다. 좀더 미스터리어스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아, 하나만 더.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그녀의 소설은 모두 일곱 권, 그럴 일은 없겠으나 혹시라도 누가 나보고 그중에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플라나리아』다.

/월간 드라마틱 200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