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의 시작

from 이벤트 2011/10/10 10:14

 
판사를 막 차렸던 초창기에는 내고 싶은 전집들이 많았다. 엘러리 퀸이나 젤라즈니 전집 같은. 근사한 장정으로 오와 열을 맞춰서 책장에 꽂아만 놔도 뿌듯한 기분이 들 법한 그런 책들 말이다. 하지만 바람일 뿐. 구멍가게 수준의 출판사에서 그걸 통째로 실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출판계의 현실적인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시리즈는 자금과 조직이 있는 메이저 출판사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시간이 흐르고 출판에 대해 약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쯤. 이런 시리즈는 정말 자금과 조직이 있는 메이저 출판사에서만 가능한 얘기일까, 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정말 그럴까. 북스피어처럼 자금과 조직이 변변치 못한 출판사들에게는 어렵기만 한 일일까. 그래서 고민해 보았다. 몇 개의 출판사가 힘을 합쳐 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엘러리 퀸의 모든 작품을 두세 개 출판사가 함께 내는 거지. 디자인과 장정을 통일해서. 마치 한 출판사에서 만든 시리즈인 것처럼.

그게 가능해? 일단 어느 출판사가 어떤 작품을 가져갈지에 대한 대목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칠 게 뻔하고. 아무리 걸출한 작가라도 모든 작품이 A+인 건 아닐 터. 서로 좋은 작품을 가져가려고 할 텐데 보나마나 파토지. 게다가 디자인을 통일한다는 게 말처럼 쉽나. 취향과 스타일이 다른 채로 몇 년씩 출판을 해온 선수들의 안목을 어떻게 다 고려해. 그런 생각을 하며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던 중이었다.

당시 북스피어는 미야베 미유키가 편집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이라는 세 권짜리 시리즈를 출간하여 고전하던 중이었다. 사실 이 책은 나름대로의 야심작이었다. 단편 하나하나의 내용은 물론 편집이나 장정 어느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게 없다고 자평하며 얼마나 뿌듯해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까지는 아니었지만 상권만 손익분기점을 넘었을 뿐 중권과 하권의 성적표는 참담했다.

이렇게 훌륭한 책을 몰라보다니. 아아 야속해. 결국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이후로 세이초의 장편을 내려던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때가 오겠지, 그때까지 기다리자. 어쩌면 못 낼 수 있겠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출판사 연합으로 걸출한 작가의 전집을 통일된 장정으로 내면 좋겠다는 얘기는 내가 꺼냈고, 그 작가로 마쓰모토 세이초가 어떻겠냐고 제안한 사람은 역사비평사의 조원식 주간이었다. 그는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를 읽자마자 세이초에 반했고 어떻게 이런 작가가 여지껏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는지 의아하다고 했다.

우리는 금세 의기투합했고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게다가 세이초가 누구인가. 방대한 지식으로 경계를 넘나들며, 그가 쓴 픽션이 추리소설인가 아닌가, 그의 역사관이 정통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매우 관념적이고 재미없는 의문을 놓고 한 시대가 헛된 문학적 입씨름을 하는 동안,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와 역사에 대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을 쓰고 또 씀으로써, 오로지 작품만으로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던 작가 아닌가. 그는 “추리소설가이자, 역사가 심지어 고고학자”이기도 한 사람이다.

추리소설가이자 역사가인 세이초의 전집을 북스피어와 역사비평사가 힘을 합쳐 낸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비아냥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궁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곧바로 에이전트와 접촉하였다. 계약하려는 작품의 수가 많은 만큼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일본 측도 당황하는 눈치였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설명과 자료 향후 출간 계획 등에 관해 귀찮으리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물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선인세를 비롯한 계약 조건에 관한 신경전도 이어지면서 금방 진행될 줄 알았던 계약은 지체되고 말았다.

지난한 줄다리기는 몇 개월간 이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주체들이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고, 현재 모든 계약이 완료되었다. 나중에 에이전트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두 출판사 연합이라는 대목이나 계약을 진행한 작품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일본 측에서도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획의 취지에 공감해 주었고, 결국 우리가 원하던 조건으로 계약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초 세이초의 작품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난항이 예상됐지만 이건 의외로 쉽게 매듭지어졌다. 서로 원하는 작품이 명확했고, 희안하게도 거의 겹치지 않았다. 몇 작품이 겹치긴 했지만 대의를 위해 흔쾌히 양보해 주는 분위기였다고 할까.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참으로 바람직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역사비평사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모비딕'이라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모비딕과 북스피어는 내년 1월 동시 출간을 목표로 각각 『D의 복합』(모비딕)과 『짐승의 길』(북스피어)을 만드는 중이다.

이번 ‘세이초 월드’라는 기획의 목표는 당연히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한국에 제대로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규모가 작은 출판사들도 연대를 통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금과 조직을 보완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다. 뭐, 그러기 위해서는 책이 잘 팔려서 결과가 좋아야겠지만.

이상, ‘세이초 월드’에 관해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이달 말에 관계자 미팅이 있어서 모비딕과 북스피어가 함께 일본에 간다. 다녀와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아울러, 이 공간에는 출판계 관계자 분들도 많이 드나드니까 계약조건이나 선인세에 관해 궁금해할 것 같은데 첫 책이 나올 시점에 향후 출간목록과 더불어 한꺼번에 포스팅할 생각이다. 좀 기다려 주시길.

서론이 길었다. 이제 오늘의 본론. 

모비딕과 북스피어가 첫 번째 난항에 봉착했다. 각 출판사는 이번 시리즈를 통일된 디자인으로 내기로 한 만큼, 각자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의뢰하여 가장 뛰어난 디자인 컨셉을 보인 시안을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이게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은 거다. 이미 한 차례 진검승부를 하였지만 무승부. 그날 우리는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빈대떡을 쩝쩝 씹으면서 디자인에 관해 다시금 협의 비슷한 걸 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독자평가단 5명을 구성한다.
2. 독자평가단 모집은 북스피어 블로그에서 하되 선발은 모비딕이 한다.
3. 북스피어와 모비딕 각 1명과 독자평가단 5명이 홍대 모처에서 만난다.
4. 어느 출판사에서 해온 디자인 시안인지 독자평가단은 알 수 없는 가운데, 그 자리에서 어떤 디자인이 나은지 오직 독자평가단만 심사한다.
5. 그 결과에 대해 각 출판사는 두말없이 승복한다.
6. 시안이 채택된 출판사는 그날 술값을 책임진다.

구태여 공개적으로 모집하지 않고 지인들을 부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공개적인 모집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해보기로 낄낄거리며 합의했다. 물론 이번 회합은 한 출판사에서 디자인1번, 디자인2번, 디자인3번을 쭉 늘어놓고 어떤 게 가장 좋아보이나요? 하고 묻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두 출판사가 사활을 걸고 한 디자인이고 이러한 전례가 없었던 만큼 그 결정이 어렵기 때문에 독자평가단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재미있을 것 같은 분위기는 즐기되, 모두 사명감을 가지고 디자인을 평가해 주길 바란다.

회합은 10월 11일 화요일 오후 7시.
장소는 홍대 모처.

모처가 어디인지는 뽑힌 분들에게 개별적으로 알려드리겠다. 일단은 이번 독자평가단 모집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분들, 댓글 달아 주시기 바란다. 되풀이하지만, 선발은 내가 하지 않고 역사비평사에서 한다. 그러니까 뭐든 뽑힐 만한 소스를 댓글로 달아주시기 바란다. 예를 들면, 디자인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든가, 사실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이라든가...

그날 일곱 시에 홍대 모처에서 모여 각 출판사 관계자가 잠시 퇴장한 가운데 독자평가단이 디자인을 심사하고, 심사가 끝나면 저녁을 겸한 축하주를 한잔할 계획이다. 어떻습니까? 재미있겠죠? 그러니까 얼른 응모해 주세요.

모집은 지금 이 시간부터. 마감은 내일 11일 오전 12시까지. 오후 1시에 발표하고 개별 연락을 드릴 테니 응모하신 분들은 1시쯤 블로그를 반드시 방문하시고 뽑히신 분들은 연락처를 남겨주기 바란다. 그래야 어디로 오라고 할지 알려줄 수 있으니까.

덧) 세이초의 책은 픽션과 논픽션을 모두 출간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