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국문학과에 들어갔기 때문이어서 그랬을 거라 짐작하지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동기들끼리 서로서로의 무슨무슨 기념일을 챙겨줄 때 반드시 책을 선물했다. 마치 전통처럼.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또 책 얘기인 것이다.

당시만 해도 책이란, 주는 쪽에서도 받는 쪽에서도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주는 쪽은 ‘비교적’ 싼 값에 고민 없이 선물할 수 있고, 받는 쪽에서도 워낙 그동안 읽은 책이 없다 보니 뭐가 됐든 책이면 좋은 것이다.

학년이 올라가서, 책 좀 읽었다 싶으면 슬슬 이런 주문들을 하기도 한다. 이번 생일에 나한테 무슨 책 줄 거냐.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태백산맥> 열 권으로 하면 어때, 좋지? 그럼 너는 1권, 너는 2권... 하는 식.

그렇게 모은 책이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 있다. 오늘, 우연히 책장을 옮기다가 그때 받은 책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 끼워진 카드를 보고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웃고 말았다. 그 내용이 뭐였냐면,


마치 <오성식의 중학영어>를 두서없이 몰래 베낀 듯한 글귀.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읽고 나니 무척 유쾌하다.ㅎㅎ 한 권의 책에 끼워진 저 짧은 글귀 덕분에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아주 간단하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동기들도 이제 서로의 생일에 책을 선물하지 않는다. 나 역시 뭔가를 적어 책을 선물한 기억이 까마득하다. 혹시 기억나시는지. 직접 책을 고르고 뭔가를 적어 누군가에게 생일 선물로 내밀었던 때가 언제인지, 그때 무슨 말을 적어주었는지...?

다이도지 케이의 사건 수첩  다이도지 케이의 사건 수첩 - 9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시작


책읽기 추천 장소&시간대 : 빠른음식점이나 OO다방 구석에 앉아 30분 넘게 지각하는 친구를 기다리며.

이게 그러니까 경찰 소설…은 아니고, 탐정 소설…이라긴 좀 그렇고, 차라리 재난(봉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남들 등살에 떠밀려 경찰이 되었던 다이도지 케이란 남자가 17년간 근무했던 경찰을 그만두고 책을 하나 씁니다. 바로 첫 번째 에피소드 제목이자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죽어도 안 고쳐져』라는 책입니다. 얼간이 범죄자에 대한 실화를 엮은 책입지요.

그 책(과 후속작 『죽여도 안 죽어』)을 쓴 후 책에 등장하는 범죄자들의 잇단 도전(!)을 받게 되는 불운(?)한 사나이 다이도지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책인데(자세한 사항은 서지 정보를 보시라) 각 에피소드 사이에 다이도지가 경찰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으로 담당했던 사건의 전모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과 에피소드의 등장인물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부분이 또 하나의 매력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책읽기 추천 장소가 매우 가볍습니다만, 그렇다고 킬링 타임용 책이란 건 아닙니다.
생각하면 왠만큼 사망률도 있고, 뒷맛이 찝찝하기도 하고, 다이도지란 남자의 지난 삶 자체가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도 이 책이 이렇게 가볍고 잘 읽히는 건 아마도 호탕한 문장, 나아가 다이도지 케이라는 캐릭터의 유쾌함 때문이겠지요.
자신은 굉장히 무기력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다이도지는 어느 탐정 부럽지 않은 명석함과 어느 범죄자(?) 부럽지 않은 기민하고 치밀한 계획성을 가진 남자…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런 갭이 소시민적이라(!?) 귀엽습니다.

띨띨한 범인들(자신들은 모두 치밀하다고 자부함)이며, 하나 같이 성격 있는 주변 인물들이 톡톡 튀어서 시트콤을 몰아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요. 수목드라마는 안 챙겨 봐도 시트콤은 챙겨 본다는 모씨에겐 룰루랄라할 책이었습죠. 안 그래도 겨울(미묘한 환절기?)이라 푸석푸석 건조한 마음에 수분 크림으로 힘을 준 느낌입니다.


흠흠. 어쨌거나 지각한 친구가 헐레벌떡 오는 모습이 보이면 책을 덮고 조용히 다가가 실수인 척 책 모서리로 때려 줍시다, 훗.


작품과는 상관없는 사족)미도리의 책장 라인업은 하나 같이 기대작인데, 그중 가장 기다리고 있는 건 역시 우로보로스 시리즈입니다! 우옷! 일어판을 사 놓은지 어언 3년, 읽을 생각은 좀처럼 없...한국어가 그리운걸요!

-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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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에 푹 빠졌던 중학교 시절을 기억합니다. 셜록 홈즈가 강호를 평정하고 겨우 포와로가 그에 맞서 균형을 잡고 있던 시절, 마플 양과 뤼팽 씨가 주변에 머물던 그런 시절, 탐정이란 오로지 홈즈만을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했던 때 그렇게 전설의 '자유추리문고'는 등장헀습니다. 거기서 저는 절름발이, 장님, 술주정뱅이도 탐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죠. 거기서 전 최고의 탐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파일로 밴스입니다.

아직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담배꽁초니 립스틱 자국이니 마차 바퀴자국을 증거로 범인을 알아맞히는 것만이 추리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제게는 밴스의 추리 기법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물적 증거는 오히려 부차적이며, 범인의 “심리적 흔적”을 따라 범죄를 커다란 구조 안에서 완성시켜야 한다니요. 게다가 잘난체하는 독설가라니. 진짜 잘났기 때문에 더 얄밉죠;;; 파일로 밴스의 성격은 ‘현학’ 그 자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지적이고 감수성도 풍부한 진정한 귀족이죠. ㅎㅎ 암튼, 밴스를 만난 뒤로 제게 최고의 탐정은 밴스였습니다.

왜 밴스 얘기를 갑자기 하냐고요? 혹시 지난 3주년 이벤트 때 제가 어느 독자분의 댓글에 단 답을 기억하실 분이 계신가요. 그때 제 꿈이 “S. S. 반 다인의 전집”을 제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죠. 또, 지난 2009년 출간 예정작 중에 ‘보물’이 있다면서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기억하시나요?

네에, S. S. 반 다인 완역 소장판이 드디어 옵니다.
올여름 첫 권을 시작으로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 전작 출간을 목표로 출항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작품 『딱정벌레 살인 사건』(과 소개되지 않았던 다른 작품 하나)을 시작으로 번역자 선생님이 이미 분투중이십니다. (누군지 아시면 까암짝 놀라실걸요? 우후훗~) 저희 계획은 한국에 출간되지 않았던 작품을 포함하여 두 작품씩 한 권의 책으로 묶어 6권 전질을 만들 목표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선집 형태의 2~3권 분량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습니다. 전집 출간을 약속드리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 주시겠지만) 미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꾸벅*

한국에 이런저런 판본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도 사실인데, 이번 판본에서는 파일로 밴스의 현학적인 대사의 맛을 제대로 살려 고전 미스터리의 매력을 담뿍 맛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제야말로 마음먹고 제대로 만드는 완역 소장판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여러분을 모두 밴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음하하하. 소식은 계속 전달하겠습니닷! -虎-

S. S. 반 다인이 대체 누구이길래?

저 혼자 흥분해서 호들갑을 떨었지요? 반 다인이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미스터리를 꾸준히 읽어 오시지 않은 독자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제가 이렇게 흥분하는지 어리둥절하실 테고요. 에헷. 반 다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시거나 대강 소문으로만 들으셨던 분들을 위해 대강 보충 설명.

반 다인은 처음부터 미스터리 작가는 아니었어요. 그는 원래 고고학이나 인류학 등의 인문학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미술과 음악 같은 예술 분야의 비평가로 활동했는데, 신경 쇠약증에 걸리면서 책과 펜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엄명에 소일거리를 찾다가 가벼운 소설 정도를 허락받고는 미스터리를 탐닉하기 시작했죠. 그러는 동안 하찮게 여겼던 미스터리가 나름의 규칙과 매력을 가진 "고급 오락"이라는 걸 깨닫고 그때까지 나온 미스터리들을 모두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미스터리 평론가로서의 안목까지 갖추게 되지요.

그는 온갖 결점들을 안고 있는데도 잘 팔리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가, 자신이라면 더 훌륭한 미스터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왠지 파일로 밴스처럼 오만방자 -_-) 그러고는 그때까지의 진부한 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구성을 가진 미스터리를 세 권 한꺼번에 뚝딱 써냈다고 해요. 그렇게 시작된 파일로 밴스의 발걸음은 세 권으로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최고의 자리를 꿰찼지요.

반 다인은 그의 필명인데요, 본명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 그때까지만 해도 미스터리 작가란 미국에서도 그다지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인데다 평론가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필명을 썼다고 하네요. 그는 미스터리를 "지적인 게임"이라고 불렀는데 파일로 밴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에는 확실히 범인을 잡거나 독자들의 눈을 가리는 트릭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지요. 그가 원래 관심하고 있던 고고학이나 예술, 고전, 언어학 등의 폭넓은 지적 탐구 의식과 평론가로서의 엄격한 시각에 예술적인 감성이 결합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반 다인은 병실에서 얻은 미스터리 독서 경험(그가 읽은 미스터리가 수천 권에 달했다고 하지요)을 바탕으로 관련 논문도 집필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스터리 작가가 지켜야 할 20가지 규칙>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도 팬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당대 미스터리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앤솔로지를 엮기도 했는데 이것이 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반 다인의 작품은 모두 열두 권이에요. 단 열두 권으로 20세기 미스터리에 지워지지 않는 굵은 획을 그었습니다. 그는 사실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작품 수는 모두 여섯 작품이라고 했다고 해요. 다른 작가에 비하면 적은 작품이지만 그의 기준에 비하면 너무 많은 양을 썼지요. 그래서일까요? 앞의 여섯 권은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뒤의 여섯 권은 조금 낮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반 다인의 작품 안에서의 상대적인 평가일 뿐, 다른 작가에 비한다면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보이고 있으니 열두 권 모두 반드시 읽어야 할 미스터리 고전에 포함되어 있죠.

파일로 밴스에게는 왓슨의 역할을 하는 '나' 반 다인 외에 뉴욕 지방 검사인 매컴이 콤비로 활약합니다. 매컴은 정의롭고 강직하지만 고지식한데다 융통성 없는 인물로 등장해요. 밴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은 왓슨 역할을 하는 반 다인이 아니라 매컴 쪽이죠. 사실 밴스는 홈즈처럼 '탐정'의 명찰을 달고 있진 않습니다. 그저 검사인 매컴의 친구로서 '조언'을 하는 역할이니까요.

반 다인 작품의 재미는 밴스와 매컴, 반 다인의 나누는 대화에 80% 이상이 있습니다. 잘난 척에 진짜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밴스야 그렇다 쳐도 매컴과 화자인 반 다인 모두 하버드 출신의 현대 뉴욕의 귀족이나 다름 없거든요. 예의 바르고 교양이 넘치며 품위까지 갖춘 이들이 범죄를 눈앞에 두고 벌이는 대화는 작품의 백미!

아아, 이렇게 쓰다 보니 할 말은 늘어가고 정리는 더더욱 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서 내고 싶은 욕망(네, 그렇습니다. 욕망입니다.)이 치솟아 어쩔 줄 모르겠어요. 번역자 샘 독촉하러 가야겠습니다. 음핫!

 
개 책값을 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 즉 원가를 계산하고 대략의 판매량을 예측하여 출판사가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정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서점에 나가서 출간하려는 책과 비슷한 판형과 분량(페이지 수)의 책들을 일별한 후 그 책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겠다 싶은 범위에서 정하는 방법.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일까. 전자가 합리적으로 보이고 후자는 다소 덜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출판사는 어떤 방법으로 책값을 정할까. 전자일까? 물론 전자를 선호하는 출판사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후자를 선호하는 출판사들이 전자를 선호하는 많은 출판사들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

왜냐. 의외로 많은 독자들이 책의 분량을 기준으로 놓고 싸다거나 비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책의 분량, 다시 말해 몇 페이지나 되느냐에 따라 책값이 매겨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돼 버린 것이다. 아니, 그게 왜 문제인가. 분량이 많으면 가격이 비싸고 분량이 적으면 가격이 싼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라고 반문하시려는 분들. 40년 동안 신화만 연구하고 집필한 사람이 펴낸 4,000페이지짜리 인문서와, 4000만 명의 전화번호가 담긴 4,000페이지짜리 전화번호부 중에서 어느 쪽에 높은 가격을 매겨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혹시 티파니 양의 번호가 들어 있다면 저는 그 인문서의 책값만큼 주고 전화번호부를 살 용의가 있습니다만.)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송구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거다. 책값을 결정하는 요인은 용지나 잉크 외에도 많다. 스타 작가와 신인 작가의 인세가 다르고, 원저작료와 번역료가 다르다. 디자인 비용이 다르고 책에 알맞은 용지의 질에 따른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요컨대, 단순히 얼마나 두껍냐 안 두껍냐 하는 문제로 결정한 사안은 아니라는 거다.

얘기가 약간 다른 길로 세지만, 내가 출판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놀란 대목은, 책을 만드는 주체 가운데 돈을 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저자, 역자, 디자이너는 엄청난 작업량을 감당하면서도 매번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고(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다음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고, 다음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면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인쇄소, 제본소, 출력소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출판사가 망해서), 노동의 대가를 이상한 형태의 자본(6개월짜리 어음 같은)으로 지급받는다. 물론 일부 출판사들 때문에 제작처가 고생하기도 하지만(북스피어도 최근 4개월 동안은 제작처에 계속 어음 지급했다), 여기서 이러한 총체적인 문제를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우리 나라의 출판 산업 전반에 걸친 정치한 분석이 뒤따라야 될 터이니 이건 생략하도록 하자.

결국 양질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수반되는 인프라가 좀 구축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책값이 좀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다. 20,000부가량의 수요가 있는 책에 붙는 가격과 2,000부가량의 수요가 있는 책에 붙는 가격이 달라야 하고, 같은 400페이지라도 여러 가지 요인에 따른 원가가 고려된 가격을 출판사가 붙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독자의 규모가 늘어나면 생산 원가는 낮아진다.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에서만 보자면, 독자가 1천 명인 책은 1만 명인 책보다 가격이 몇 배가 비쌀 수밖에 없다. 책값이 터무니없이 비싸게 여겨진다면, 출판사에서 ‘원가’의 몇 배나 되는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전에 그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소수의 권리도 무시하지 않고 비록 비싼 값으로나마 책으로 펴낸 출판사의 판단에 박수를 보낸다면 더 좋은 일이다.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책값을 올려서 공연한 욕을 먹기보다 차라리 출간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책&, 2008. 12.)”

출판평론가 변정수 씨의 얘기다. 책값을 올려 공연한 욕을 먹기보다 차라리 출간을 포기하는 쪽, 이라는 대목에서 문득 가슴 한켠이 아리는 걸 느낀다. 출판업자로서도 독자로서도 충분히 공감한다. 원서를 읽을 수 없어 한국어판이 출간되기만을 기다리다 포기한 적이 있는 특정 장르의 팬 가운데는 아마 그 ‘공감’을 충분히 공감하는 이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이 가능하겠다.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출판사가 마음대로 정가를 정하게 내버려두면 장땡이라는 거냐. 당연히 아니다. 멀쩡한 원서를 서너 권씩 분책하고, 자간을 늘려 두껍게 만들어 마음대로 가격을 붙인 책에 대해 비난하지 말고 고분고분 말없이 책을 사라는 게 아니다. 독자들에게 부담을 지우자는 말이 아니다. 이 문제는 공공기관이 좀 나서줘야 한다는 얘기다.  

“묘안이 없는 건 아니다. 600여 개의 공공도서관과 1만여 개의 학교 도서관이 바로 그것이다. 1만 6000여 개의 도서관 중 20%인 2,120개의 도서관에서 미국처럼 정가의 2.5배에 해당하는 도서(Library Edition)를 구매한다면 출판사로서는 안정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는 것이다.(서울 경제, 2009. 2. 16)” 

반드시 미국처럼은 아니더라도 초판이 도서관을 통해 소화가 되어 안정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면 출판사도 합리적인 정가를 도출할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문고본 같은 다양한 형태의 시도도 충분히 가능해질 거라 생각한다. 그에 따라 저자, 역자, 디자이너, 제작처 들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을 테고, 자연히 책의 퀄리티도 상승할 테고, 결국 독자들도 만족할 만한 형태의 책을 사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으로서는 그런 장밋빛 청사진은 고사하고라도, 신간이 나오면 좀 제때에 도서관에서 구경할 수 있기만 해도 좋을 판이긴 하다만. -.-; 

덧) 방명록에 ‘인스’ 님께서 문고본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있는 생각 없는 생각을 이리저리 조합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장타로 읊조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와, 이 정도 쓰는 데도 지쳐 버렸어요. ㅎㅎ 딱히 결론도 없고 그다지 생산적인 해결책도 제시할 순 없지만, 쟤는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있군,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을 듯.





무도 그런 부탁을 하진 않았지만, 지난해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재미있었던'이 아니라) 책을 하나만 대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조현일 씨가 쓴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을 꼽겠다. 가라타니 고진의 논문 <근대문학의 종언>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잘못’ 읽히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는 이 책에는, “현대 일본문학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 한국문학의 우월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우리 문단의 분위기랄까 하는 부분이 너무 잘 드러나 있어 읽으면서 꽤나 놀랐다.

더불어 “한국문학의 부활”이라는 수사가 은폐하고 있는 문단의 실상이나, “자신의 밑천을 전부 걸지 않아도 되는” 비평가의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 심지어 한일 양국 베스트셀러 문학도서의 유통방식에 대한 (약간의) 고찰까지, 나로서는 여러 가지로 좋은 공부가 되었고 덕분에 김윤식 선생 표절 공방 때 사서 마냥 묵혀두었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다)을 다시 펼쳐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왜 이 얘기를 꺼냈냐 하면, 그 책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을 대표하는 상업출판사인 고단샤의 경우, 1988년 <고단샤문예문고>를 창간하여 판매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일본근대문학의 유산을 총망라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돈만 잡아먹는 기획이다. 그런데 소위 문화국가라는 우리의 경우, 이 시리즈에 버금가는 기획물을 갖고 있기는커녕,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전집조차 없는 작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대형출판사들이 나서서 주요작가의 경우 몇 번이고 전집을 재출간하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도 대형 출판사들의 경우, 이른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전집은 몇 번이고 재출간하여 잔뜩 가지고 있지만 ㅎㅎ... 아니아니 역시 쓸데없는 비아냥거림은 삼가도록 하자. 여튼 문학사에서 중요한 취급을 받는 작가와 작품은 많지만, 정작 제대로 된 전집이 없는 한국 문학의 현실은 전술한 바대로 그간 여러 논자들에 의해 지적돼 왔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을 만드는 지식('지만지'는 ‘지만지 고전천줄’이라는 동서양 고전들의 요약본을 내며 관심과 질타를 동시에 받기도 했던 출판사다) 출판사가 펴낸 <한국 근현대문학 총서>는, 선정된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발표 당시 표기 형태를 최대한 살리겠다는 취지 역시 상당히 평가받을 만하다.

이번에 출간되는 총서에는, 최초의 전문 탐정소설가로 평가되는 김내성의 『마인』과 1940년 일본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김사량의 작품집 등도 포함되어 있다. 당장 전질을 구입하기는 돈이 없어 곤란하지만, 관심이 가는 몇 권은 사 봐도 좋을 듯싶어 목록을 갈무리해 두었다. 헌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기사가 눈에 띤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이유로 통일부의 출간 검증 절차가 필요한 황건의 『개마고원』은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소식이 소박하게나마 세상에 알려진 건,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라고 밝힌 이가 <아고라>에 올린 글 덕분이다. 내용을 읽어 보니, 이번 총서에 포함돼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소설가 황건의 『개마고원』 출간에 대해 통일부가 제동을 걸고 조건부 승인 방침을 밝힌 모양이다. 그 조건이란 게 대략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들어간 문장(“그사이에 평양에는 북조선 인민 위원회가 창설되고 김일성 장군이 위원장으로 추대되였다.”) 삭제할 것, 남한군이나 미군을 ‘원쑤’라고 표기한 대목(“나는 조국의 이 엄중한 날에 원쑤에 대한 싸움보다도 내 개인을 위한”) 삭제할 것, 미군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 들어간 문단(“피난 가다 숨은 두 녀자를 미국 놈들이 발견하고 겁탈하려 끌어냈던 것이며”) 전체를 들어낼 것. 하지만 『개마고원』은 이미 학자들의 연구를 위해 국내에 들어와 있으며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가면 일반인도 열람할 수 있는 책일 뿐만 아니라 20여 년 전에는 국내 다른 출판사에서 원본 그대로 출간한 적도 있다고 한다.

<아고라>에 올라온 글을 읽기 전까지 나는 황건이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개마고원』이라는 책이 출간돼도 적극적으로 구입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신경숙의 소설이 잘 팔리고 황석영의 소설이 엄청나게 팔리는 것이 “한국 문학의 부활이고 축복”이라면, 황건의 『개마고원』이 당시 표기 그대로 출간되는 것 역시 한국 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또 다른 의미의 부활이자 축복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허나 지만지 출판사는 이미 제작까지 마친 『개마고원』의 출간을 포기했다고 한다.  

덧) <시사in>에 보낸 글을 약간 고쳤음. 아래 사진 출처는 <한겨레>.




정말이지 이렇게나 많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T_T
정확하게 1시가 되자마자 오시기 시작한 독자님의 물결은 일일이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익히 저희와 친분이 있는 분들까지 방문해 주셔서 저희 넷은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는 상황.........;;;;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정말 죄송하게도 지난주 공지했던 바자회 일정 및 시간을 변경하려고 해요.

오늘 하루만 해도 전혀 저희가 다른 작업을 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일주일을 지내면 다음 달에 나올 마쓰모토 세이초와 나카지마 라모 신작 일정은 장담할 수 없어지겠더라고요. 네에, 전 사실 하루에 대여섯 분 정도 오실 줄 알았습니다. T_T 이런 호응을 예상치 못한 저희 잘못이긴 한데, 이러다 출간 일정에 차질을 주는 것도 웃기는 일인지라 부득불;;;;;

기간2월 19일(목), 20일(금), 21일(토) 3일간!
시간오후 6시부터 9시까지.
21일 토요일은 원래대로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이러면 직장인 분들도 조금 여유 있게 방문하실 수 있을 테고, 저희도 근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이 공지를 늦게 보시고 그냥 방문하신 분들은 할 수 없지만, 다른 분들은 가능하면 바뀐 시간에 방문해 주십사 부탁드려요. *꾸벅*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길........ ㅠ.ㅜ

오늘 오셨던 분들, 한분 한분 인사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거 아시죠? ;;;;; 모두 반가웠습니다. 이사가서 언제 바자회 말고 독자 사은회라도 마련할게요. -虎-

아낌없이 주련다

from 이벤트 2009/02/14 00:33


전에 모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꽤 심난한 마음을 표현한 글이었는데,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사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발렌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주고 싶다. 하지만 제대로 된 초콜릿을 주고 싶지는 않다. (뭔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던 듯합니다. 암튼 이 부분이 중요한데_편집자 주) 호감이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ABC 초콜릿'처럼 너무 성의 없어 보이는 건 곤란하고, 뭔가 쉬크한 듯하면서도 부담 없는 그런 초콜릿이 있다면 추천해 달라...

그 밑으로 주옥같은 댓글이 참으로 많이 달렸더군요. 그 가운데 제가 빵 하고 웃음을 터뜨린 댓글이 뭐였냐면,

――<찰리와 초콜릿공장> 디브디이가 어떨까효.

...였습니다. ㅎㅎ

음.
미안합니다, 쓸따리 없는 얘기였구요(써놓고 나니까 저만 웃었나 싶기도).

**

실은,
금번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하야,

그간 북스피어의 각종 사역(박스포장 및 독자교정 및 기타 등등)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고생하신 독자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자는 의미에서 조촐한 이벤트를 마련하였사온데,

솔로분들을 모아 이참에 확 커플로 만들어 드리는 이벤트...라도 하고 싶은 마음 정말이지 간절하옵니다만, 제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 마당에 그건 상당하고도 상당한 오바인 듯싶고,

여튼,
그리하여, 대관절 준비한 게 뭣이냐.

바로 연인과 나란히 앉아 볼 수 있는 영화표올습니다. 여여 커플, 남남 커플, 여남 커플 남여 커플 모두모두 환영하는 바이니 부담 없이 응모하시길 바라오며. 아래, 시간 및 장소입니다.


시간_2월 17일(화요일) 늦은 8시 40분

장소_스폰지하우스 중앙 시네마(옛 중앙극장, 약도는 검색하면 나옴)

영화_오이시맨(영화 정보도 검색하면 아마 나올 거임) 


오늘을 위하야 꼭꼭 감추어 두었던 시사회 티켓 30장(1인 2매)을 방출하오니, 영화에 관심 있는 독자 제위들께서는 망설이지 마시고 즉시 지원하시옵소서.

지금부터 선착순으로 서른 명 신청 받습니다. 단, 신청은 비밀댓글로 해 주시옵고, 신청하실 때 “이메일, 전화번호, 이름”을 꼭 기재하여 관람의 기쁨을 누리시길 부탁드리옵나이다.

덧) <대단한 이벤트>도 아닌 이벤트임에도 불구하고 생색은 있는 대로 내는 듯하여 조금 죄송. -.-;; 








북스피어가 이사를 갑니다. 정들었던 마포의 ‘응가 빌딩’을 떠나 남쪽 물을 마시러 갑니다. 책이 엄청나게 팔려 떼부자가 되었다거나 대표가 로또에 당첨되어 옮기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건 아니고 이러저러그러요러한 사정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사는 꽃 피고 새 우는 봄에 할 텐데요, 사무실 짐정리 겸 책들을 정리하고자 도서 바자회를 마련합니다.

짐의 82.831%가 책인지라 가지고 가자니 많고, 책도 상하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 생각 끝에 책에 굶주린 독자들을 모시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소는 북스피어 사무실, 기간도 일주일로 정했습니다. 북스피어의 구간과 신간, 새 책과 중고책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 20% 할인부터 단돈 1,000까지, 아~ 싸다 싸!! 더불어 편집부 각자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까지 대방출(만화책 포함)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 북스피어 도서 바자회
장소 : 북스피어 사무실 (위치는 이 포스팅 참조/주차장 완비)
기간 : 2월 16일(월) ~ 2월 21일(토)
오픈 시간 :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목요일과 금요일은 오후 8시, 토요일은 7시까지)



처음 오는 분들도 대환영입니다. 독자, 번역자, 필자, 타 출판사 편집자, 영업자 모두 환영입니다. 다만 사정상 목록을 따로 알려드리기 힘들고, 수량이 한정되어 있으니 원하는 책이 있다면 일찍 방문하시는 편이 유리합니다. 전화 문의는 받지 않으렵니다. 궁금한 점은 댓글 달아 주세욥. (저희 신간 작업도 해야 하거든요 T_T;;) 편집부 개인이 내놓는 책은 월요일에 사진을 찍어 올리겠습니다. 집에서 공수해야 하므로 목록이 계속 변경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만화책도 많이(?) 가져다 놓을 예정. (잘만 부르면 공짜가 있을지도?!!) -虎-

※ 신용카드 및 부루마불 캐쉬는 받지 않습니다.
※ 많이 구입하실수록 혜택도 많아집니다.
Tag // 바자회, 이사

사진 출처 : http://athens.co.jp


나카지마 라모를 처음 만난 곳은 일본 미스터리 전문 번역자이신 권일영 선생님 작업실이었습니다. 그때는 한창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만 연달아 나오던 시기였는데, 저희는 미야베 미유키 외에 또 다른 일본 작가를 물색중이었지요. 현재 활약하고 있는 작가들은 이미 많이 경쟁이 붙어 있기도 하고, 특색 있는 작가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추천해 주신 작가가 바로 라모입니다.

원래 라모는 권일영 선생님이 숨겨두고 소개를 할 시기를 엿보고 계셨는데, 선생님을 찾아뵙기 얼마 전 저희가 검토 의뢰한 다른 작가(그 작가는 요네자와 호노부였지요)의 책이 우연히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는 바람에 대신이랄까, 저희에게 꺼내놓으신 거예요. 그때 본 책이 『가다라의 돼지』예요.

『가다라의 돼지』는 1994년에 일본 추리작가협회 장편상을 받은 작품인데 주술과 종교와 초능력과 민속학이 얼버무려진 오컬트 모험 소설입니다. 작가 소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창작열을 불태워 『감옥에서 하는 다이어트』라는 책을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대강 짐작하시겠지요? 아이큐가 185나 되는 기인이다 보니 작가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록 보컬에 광고 카피라이터에 배우까지 온갖 분야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재능을 주체할 수 없었나 봐요;;

각설하고, 작가에 흥미가 동한 저희는 검토와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가다라의 돼지』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오컬트 모험 소설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에 반쯤은 결정을 하고 말았어요.

그런 와중에 절판되었더라도 언제 나왔던 책이 없나 찾아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소개된 작품은 없었고 우연히 『가다라의 돼지』를 원작으로 한 만화 발견! 제목은 무려 『악마의 주술』........ 이름은 ‘라모 나카지마’로 되어 있고.....(그래서 『인체 모형의 밤』이 처음 등록되었을 때 ‘라모 나카지마’로 표기되는 사태가-_-) 2003년에 나와 이미 절판된 만화인지라 헌책방을 털어 구입했습니다. 제목이 내용과 연관이 있어서 찍었기 때문에 책이 오기 전에는 『가다라의 돼지』를 원작으로 하는 것인지 그냥 동명이인인지는 알 수 없었죠.



드디어 책이 도착하고, 내용 확인을 시작했습니다. 보니까 맞더라고요. 다만 세 권 전부의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 1권의 내용만 줄거리 압축+요약. 나카지마 라모의 디테일한 설정과 묘사도 빠져 있는데다 원작의 분위기는 거의 느낄 수 없는 구성인지라 검토에는 별로 도움이 못 되었습니다;;;

암튼 이러구러 특이한 소재에 흥미진진한 오락 모험 소설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내기로 결정! 일본 독자들의 반응도 굳!! 하지만 한 작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 자리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작가지만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데다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까요. 글재주도 워낙 다양해서 최고작 하나만 덜렁 소개하기는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골라낸 책이 모두 네 권입니다. 알코올에 사로잡힌 남자가 오가는 환상의 세계를 다룬 『오늘 밤 모든 바에서』(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 유쾌하고 감동적인 홈드라마 『아버지의 백드롭』, 마지막으로 얼마 전 출간된 기기괴괴한 호러 단편집 인체 모형의 밤입니다. 모험 소설에 순문학과 동화에 가까운 작품, 호러까지, 완전 골라 먹는, 아니 읽는 재미가 있는 네 가지 맛 무지개 아이스크림 기획이지요. ( ")


원래는 『인체 모형의 밤』 번역을 권일영 선생님이 맡아 주시기로 했지만 워낙 바쁘고 일정이 꽉 차셔서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으셨어요.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다른 번역자를 찾게 되었죠. 그러던 와중에 권일영 선생님과도 잘 알고 지내시는 한희선 선생님께 의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희선 선생님은 일본 미스터리 번역계에 떠오르는 샛별, 저희 『대답은 필요 없어』(조만간 품절 풀릴 예정!)를 번역하실 때만 해도 신인이었으나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 사건』, 아야쓰지 유키토의 『키리고에 저택 살인 사건』,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 등을 번역하며 이제는 당당히 중견 번역자로 거듭나고 있는, 이제는 함께 고양이를 돌봐줄(?) 남친만 구하면 완벽하....... 엣헴. 암튼 그런 분입니다. 라모의 후속 작품들도 계속 소개해 주실 거예요.

『인체 모형의 밤』은 신체의 각 부위를 소재로 삼았다는 특이한 콘셉트 때문인지 책이 나오기 전부터도 많은 분들이 흥미를 보여주셨는데, 특히나 장르 문학 전문지 『판타스틱』 편집부의 눈에도 들어 처음 한 편을 잡지에 싣기도 했습니다. 잡지에 첫 단편을 실으면서 재밌는 인연을 만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다른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할게요. 마지막으로 감동적인 라모의 노래 <いいんだぜ(괜찮아)>를 감상하시면서(방송 금지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인류애가 담긴 가사의 의미를 생각하시면 정말 가슴 뭉클하실 거예요 T_T 멜로디만으로도 굳) 『인체 모형의 밤』으로 함께 달리시는 겁니다. 피라미드 파워! -虎-



※ 이 글은 알라딘 서재에도 동시에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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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노인의 전쟁』을 한달음에 다 읽었다. 아니, 한달음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1부’의 읽기를 마쳤을 때 느슨해진 입가를 조이고 한숨을 돌렸다. 정신없이 160페이지가량을 읽고 나니 대관절 저자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졌던 거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프로필을 그제야 들여다보았다. 개인 블로그에 (‘노인의 전쟁’을) 연재하다가 인기를 끌게 되어 출간한 처녀작, 이라고 쓰여 있다. 지금은 “영미 SF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되어 있다고 한다. 

대개 ‘에스에프’라는 레테르가 붙은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 서사의 표면을 넘어서는 상상력의 진폭이 너무 커서 몰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대체로 시시한 ‘사실’이지만,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신경 쓰이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노인의 전쟁』을 읽으면서 감탄했던 대목은, 그러한 선입견을 염두에 둔 듯한 작가의 자신감이었다. 그 인상적인 어조에는, 흔히 기발하다거나 영리하다와 같은 수사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노회함’ 같은 게 담겨 있었다. 그간 ‘에스에프’라는 장르가 성취해낸 다양한 기법들을 들뜨지 않은 웃음으로 적절히 버무려 놓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일흔다섯 살 이상만 입대할 수 있다는 군대, 우주개척방위군(CDF). 작가가 CDF에 모아놓은 노인들로부터 찾아낸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혹은 죽음 이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아니었다. 그는 ‘늙음은 낡음’이라는 명제에 대해 좀더 넓은 지평에서 사유한 후 비로소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에스에프라는 장르의 외양을 빌려서 말이다. 일흔다섯 고리타분해 보이는 늙은이의 몸 냄새 속에 용해되어 있는 정신의 한 자락. 구태여 정의하자면, 그것은 희망이기도 하고, 늙음 역시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와 같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오글소프 중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과 마주할 수 있다. “이것이 CDF가 노인들을 병사로 삼는 이유 중 하나다-자네들 모두가 은퇴했으며 경제적인 방해물이라서 데려오는 게 아니다. 또한 자네들이 자기 목숨을 넘어서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네들 대부분은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과 손자들을 키워보았을 것이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일을 하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 개척민이 되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자네들은 개척행성이 인류에게 좋다는 사실과 개척민을 위한 싸움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이런 개념을 열아홉 살짜리의 뇌에 박아 넣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네들은 경험으로 안다. 이 우주에서는 경험에 의미가 있다.”

클리셰와 유머로 점철된 우주 활극의 끝에서 만나는 주인공의 어스름한 추억담(“내가 정말 그리운 건 결혼 생활입니다.”)은,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애닮(달)다. 하지만 혹시라도, 무슨 소리냐는 듯 삿대질을 하며 진부한 결말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불안이나 공포 같은 감정의 뒷면에는 언제나 ‘사랑의 부재’라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자못 낯간지러운 진실과 함께, 에스에프라는 장르의 넓고 유구한 역사를 정통으로 잇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 『노인의 전쟁』은 문학적 울림보다는 철저히 오락적 재미에 치중했고, 거기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자신의 안목에 대한 일말의 쪽팔림이나 지적 수준에 대한 의심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다른 이들에게 권해줄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소설이었다. 마침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같은 출판사에서 줄줄이 나온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겠다.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샘터/ 2009년 1월)


덧) 천명관 씨의『고래』를 읽은 후에, 천명관 씨의『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읽었을 때 약간 김이 빠지는 듯한 아쉬움을 느낀 적이 있다. 『노인의 전쟁』에 일말의 아쉬움이 있다면, 딱 그 정도? 여튼, 독후감이 쓰고 싶어질 만큼 재미있게 책을 읽은 건 정말이지 오랜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