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인적 없는 교토 거리에 첫발을 디뎠다.
비좁은 싸구려 야간 버스에서 밤새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11월의 제법 서늘해진 공기를 한 번 들이마셨다.
순간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무작정 가방 하나 매고 온 교토지만
나는 갈 곳이 없어 정처 없이 골목 사이를 걸었다.
인적 없는 거리에는 책 냄새가 가득했다. 물론 책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다.
골목을 따라 이어진 오래된 목조 건물에서 나는 향이다.
늘어선 목조 건물들은 어쩔 땐
『
집지기가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에 나오는 집처럼 몽환적이고,
어쩔 땐 『
검은 집』에 나오는 집처럼 음산하다.
어떠한 모습도 전부 교토 그 자체였다.
아무런 꾸밈도 없어서 더욱 인조적인 정숙함.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일본이었다.
*
<월간 자판기(JAPAN記)>의 추군입니다. 앞으로 매달 5일에 찾아뵙겠습니다. 5일이 공휴일일 땐 그 다음 영업일(!)에 뵙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실용적이고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니, <월간 자판기>에서는 과연 독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미묘하고도 시시콜콜한 일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처음 취지가 '
나오키 상을 알면서 나오키 산주고를 모르는 실태를 통탄하며…'였기 때문에 현재 목표는
문학 시간에 배울 법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오덕하고 얼빠진 이야기로 맺기, 입니다.
*
와비사비란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일본 고전 문학의 미의식, '와비'와 '사비'.(흔히 말하는 노래 후렴구의 사비가 아닙니다=ㅅ=! 술집 이름도 아닙니다!)
일본 문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면 그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고 모니터에 강한 원념을 보낼 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말일 텐데요.
이론적으로는 이런 개념입니다.
| 유현 |
후지와라 도시나리가 와카에 있어서 제창한 미적 이념. 표현적인 미가 아니고, 언외에 감돌고 있는 의미가 깊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정적미. 섬세미와 정적미가 조화된 깊게 느껴지는 여정이다. 이 유현의 미는 와카에서 렌가에로 계승되고, 나아가 노가쿠·다도 등에 침투하여 에도 하이카이의 '사비'에로 계승되어 간다. 결국은 중세의 예술을 일관하는 근본적인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
| 와비 |
정적을 더욱 전진시킨 한적의 미적 이념. 유현과 근본적으로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무로마치 기의 다도, 수묵화 등이 오산 문학과 결부되어 성행했는데, 근세에 이르러서는 바쇼 하이카이에서의 '사비'와 함께 중심 이념이 되었다. |
| 사비 |
바쇼의 기본이념. '와비'와 공통되는 메마르고 무욕하며 담담한 경지. 구(句)의 여정이 작자의 내면적 고담의 경지를 반영하고, 깊이가 있는 정조(情調)를 띠고 있는 것을 말한다. 구를 음미할 때는, '사비'를 세분하여 '시오리', '호소미'로서 포착한다. 자연이나 인간사를 응시하는 작자의 깊숙한 영탄이 구의 여정이 되어 느껴지는 것이 '시오리', 대상에 깊이 파고드는 섬세한 시심(詩心)을 느끼게 하는 것이 '호소미'라고 하겠다. |
─『일본문학사』,신현하 ,보고사, 2002
……아, 네.
바쇼니 뭐니. 거물급 이름이 오가는 걸 보니 뭔가 굉장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수험용 지식' 되겠습니다. 저도 시험 전날 달달 외우며 증오를 불태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물론 답안지를 내는 순간 머리속에서 깨끗하게 몰아냈죠.
아마도 일본의 많은 학생들에게도 그저 '수험용 지식'이겠지요. 일본 사람들에게 '와비 사비가 뭐냐'고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거나 얼버무리려는 사람들이 87%는 될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아니면 말고요, ㅎㅎ)
와비/사비란 요컨데 '초라한 것', '쇠퇴해 가는 것'의 질박한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미의식입니다.
그리고 실은, 무척 (일본) 불교적인 사상이고요.
이런 어지러운 이론들을 보면 저는 어쩌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가 정답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미의식이 과연 이론으로 배워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운 이론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악마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은 외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일본은 이해하는 것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바깥에서 바라보고 느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어려운 이론을 끄집어낸 건 저지만, 자, 자, 이제 윗말들은 전부 잊어버립시다.
*
경고 : 이제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시험 답안지에 쓰면 교수님께 불려가거나 D+를 맞게 됩니다.
예전에 무슨 리뷰를 올리다가 우스개로 와비사비에 대해 "
일본 고전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나와서 이게 뭐야, 라고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용어. 일본 전통적인 문화의 미적감각. 정적이고 수수하고 고담하고 어쩌고하고 거시기한. 외국인이라 도저히 이해 못 하겠는데, 잘 보면 일본인도 별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일본 특유의 썰렁 코드" 따위로 정의를 내린 적이 있는데. 물론 거반 농담입니다. 사과합니다. 거반이 농담이고 나머지 중 일부는 진심이었습니다. 또 죄송합니다.
저는 이를 테면,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가, 음식을 먹다가 와비사비라는 말을 돌이켜보곤 합니다.
일본 음식은 참 미묘해요. 싱거울 것 같은데 짭니다. 특히 도쿄 쪽 음식은 짜죠. 짜지만 싱겁고요. 이 감각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한국인의 혀 안에는 '짜다≒얼큰하다'라는 공식이 입력되어 있는데, 일본은 '짜다'가 결코 '얼큰하다'가 되지 않습니다. '짠 맛'은 그냥 '짠 맛'이에요. 혹은 '짜다≒달짝지근하다' 쪽이 가까울까요.
분명히 짜지만, 매콤한 맛이 없어서 한국 사람에게 일본의 짠 맛이 싱겁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죠. 대체 이 2% 부족한 것 같은 맛의 정체는 뭔가. 떨떠름하게 먹다 보면 이게 의외로 중독성이 있어요. 싱거운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겁니다.
일본 영화는 솔직히 엄청나게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보는 내내 뭔가 부족하고 마지막은 많이 부족하죠. 그냥 그렇게 공허하게 끝나거나, 일상이 지속되는 이야기가 참 많고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참 인기가 없습니다. 개봉한다기에 보려고 하면 대체 어디에 개봉관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나마도 사나흘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죠. ……결국 저처럼 게을러서 제때 못 본 인간은 DVD를 사 볼 수밖에 없습니다.(불법 다운로드도 귀찮아서 못 받음)
정말 아주 가끔은 부지런을 떨어 혼자 조조를 보러 갑니다. 관객이 5명을 넘지 않는 영화관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면서 영화를 보며 장르 상관없이 실컷 웃다가 나옵니다(민폐). 저는 일본 영화가 좋아요. 보면 볼 수록 마음이 허해져서 좋아요. 무언가 남길 듯 남지 않아서 좋아요. 재처럼 다 날아가버리고 멍한 영상만이 눈앞에 남아서 좋아요. 처음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던 짜고 밍밍한 쇼유라멘 같은 느낌. 그 조미료의 과함과 부족함이 함께하는 독특한 느낌.
일본 소설은 가볍다고들 합니다. 사소설이라고도 하고요. 저는 가끔 그 가벼움에서 인위적인 냄새를 맡습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고의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가볍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한 일상의 아름다움. 저는 그런 2%, 아니 15%는 부족한 부분에서 와비사비란 이런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뭔가 부족한 느낌일 땐 대뜸 화내지 말고 차분히 와비사비를 즐겨 봅시다. 그러면 싱겁다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신선하게 다가올지도 모르죠. 끝까지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고요(웃음).
지금 저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
여우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교토, 골동품점, 여우탈……
이야기가 하나 끝날 때마다 발끝이 싸해지는 느낌이에요. 점점 궁지에 내몰리는 기분. 정체를 알 수 없고, 작가도 알려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은 그 불친절함이 와비사비합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훌쩍 가방 하나 짊어지고 교토로 달려갈 체력도 시간도 (돈도) 없지만,
대신 이렇게 책으로 사뿐사뿐 산책할 수 있어서 좋네요.
관광객으로 넘쳐나지만 어딘가 쓸쓸했던, 나무 냄새가 나는 그 도시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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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여사의 소식을 기대하던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특별한 이야기가 있으면 수시로 블로그에 글을 남기겠습니다.
여사님의 알려진 근황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현재 1월 1일부터 《요미우리 신문》에서 『오소로시』 속편을 연재중이셔요. 여름에 다이쿄고쿠 세 분이 함께 하는 토크쇼-'세이초와 미스터리' 티켓 예매가 내일부터인데 아, 저도 가고 싶습니다, 마음으로는 신청했습니다T_T
이번엔 첫 이야기라 가볍게 잡담을 하다가 너무 길어져 버렸네요, 호호호. 다음 호는 구체적인 작가 리뷰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문학상을 중심으로 해서 나오키 산주고라든지 이즈미 교카라든지….(여기저기서 헉 소리가 들리는 듯한, 으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