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획
처음에 기타큐슈를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싸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월급받고 사는 직장인으로써 나름 연휴라고 할 수 있는 1월 1~3일의 2박 3일간의 휴일에 집에서 뒹굴고만 있는 것이 어쩐지 억울했다. 그래, 이참에 해외로 떠보자, 기간이 짧으니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찾아보자, 라고 마음을 먹고 적당한 여행상품을 찾아보기 시작한 시점은 11월 말.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부지런했다. 선배 언니가 있어서 숙박비를 아낄 수 있는 싱가포르는 아예 전 항공권이 매진이었고, 일본의 어지간한 곳도 만석이거나 터무니없이 비쌌다.
아, 난 연휴에 집에서 뒹굴고 있을 팔자란 말인가! 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찰나, 저가항공인 제주항공에서 몇 군데 일본쪽에 국제선을 취항했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다. 알아보니 제주항공은 오사카와 기타큐슈에 취항하고 있었다. 오사카 여행을 위해서는 어쩐지 2박 3일은 너무 짧다고 느껴져 결국 방학기간에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항공권과 조식포함 호텔 2박 합해서 43만원이라는 나름 착한 가격을 자랑(?)하는 기타큐슈 여행 상품을 예약했다. 기타큐슈는 제주항공이 취항하기 전까지는 한국인 여행자가 거의 방문하지 않는 그런 곳이었지만, 얼마 전에 완성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덕분에 최근 관심을 갖게 된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이 있는 곳이라 아주 ‘듣보잡’ 도시는 아니었다.
여행을 정하고 나름 혼자서 여행의 테마를 ‘마쓰모토 세이초’로 잡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기념관은 당연히 가는거고, 어느 한 작품을 잡아서 거기 나온 무대를 죄다 찾아가볼까 하는 등등의 상상을 했지만… 귀찮아서 죄다 포기. 어차피 2박 3일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다.
#2. 미션
그렇게 기타큐슈 여행을 결정하고, 북스피어 홈페이지에 여행간다는 자랑 댓글도 슬쩍 달아보고, 기행문 하나 올리라는 답글도 받았지만 ‘그 귀찮은 짓을 내가 왜 해’ 라며 속으로 가뿐히 무시해주고 출발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
북스피어 소소별 (유일한) 플래티넘 회원이시자 거들떠보는 이 별로 없는 트위터에서 말을 걸어주시는 (은혜로운) 극소수 몇 분 중의 한 분인 김선영님께서 트위터 DM (direct message)으로 제안을 하셨다. 같이 놀자고. 나는 남자가 더 좋다며 튕기려다가… 아니 놀자고 하는 사람 백만년만에 처음인데 무슨 짓이냐! 하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침 북스피어에 놀러간다고 호야님께 얘기도 해놨으니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 때는 그렇게 일이 커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두둥!
얼굴 한 번 본적 없어 지하철역에서 빨간 목도리와 빨간 코트로 서로를 인식한 후 만나 북스피어 사무실을 방문. 새로 이전한 사무실은 선영님은 송년회 때 가 본 적이 있었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반갑게 맞이해주신 호야님께 커피콩도 선물로 드리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도중에 사장님이 합류, 양의 탈을 쓴 늑대 만들기 등등을 하며 놀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자랑질이 빠질 수는 없었다.
“저 신정 연휴에 기타큐슈 가요!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도 구경갈 겁니다. 부럽죠? 부럽죠?”
와 좋겠다- 라는 반응도 잠시.
“어 그럼 이왕 간김에 거기 관장님 만나서 인터뷰도 하고 우리 책도 전해드리고 하면 되겠네.”
라는 사장님의 폭탄 제안.
“아니 관장님을 그렇게 아무나 막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거기 기념관 규모도 작고 하니 그냥 만나자고 하면 될 거에요. 할머니 관장님이래는데 부담갖지 말고 인터뷰 해봐요. 이왕 가는 건데~”
라는 호야님의 거들기.
“이야, 재미있겠는데요? 이왕이면 얼마 전에 기사 실린 아사히신문도 보여주고 그러면 좋겠네요!”
라는 선영님의 부추김까지!
위기에 빠졌다.
아니 난 일본어라곤 2년 전에 3주간 학원 다녀서 간신히 히라가나 가타가나 읽는 수준이고, 아무리 작은 기념관이라도 그렇지 관장님이 가서 만나자고 하면 막 만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그것도 그렇지만 이거 너무 쉽게들 얘기하시는거 아니냐, 이거 무슨 동네 마실 다녀오라는 수준으로 말씀하시네, 등등의 저항을 나름 열심히 했지만… 소용 없었다. 이 분들, 강적이다.
그 와중에 한줄기 빛과 같은 소식 하나. 선영님이 일본어 학원을 다니고 계시고 게다가 초급반을 끝내고 중급반 승급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준이라고 하신다!
허걱, 이 분 잡아야한다!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아니 모처럼의 휴가때 여행 다니셔야지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냐, 누가 볼 거 별로 없는 기타큐슈까지 같이 갈 사람 있을거 같냐, 난 나름 일본 두 번 가 봤으니 선영님 첫 일본여행에 도움 줄 수 있다 등등등.
살짝 흔들리는 선영님. 옆에서 잘됐네, 둘이 다녀와, 한 명은 인터뷰하고 한 명은 사진 찍으면 되겠네 라고 좋아라 하시는 사장님, 호야님. 둘이 가면 취재비라도 주셔야죠, 하는 말에 우리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 계약금 한 3만원쯤 해볼까나? 라는 무심하고 시크한 두 분의 대답. 어이쿠.
선약이 있다며 사장님은 먼저 나가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더 나누다 일어나는 자리에 호야님의 확인사살.
“책 드려요?”
헉. 그냥 가면서 흐지부지 되면 다행이겠다 라고 안심했던 찰나인데. 이런 이런. 어쩌지 하고 갈등하고 있는데 내 손에는 이미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세 권이 쥐어졌다.
순간, 일종의 체념상태가 되어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북스피어 쇼핑백도 달라고 했다. 호야님이 명함 챙겨 주시길래 사장님 명함까지도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마쓰모토 세이초 옹의 얼굴 하나를 더 받아오게 되었다.
그냥 잊어버리고 싹 무시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받아온 책을 볼 때마다 공짜로 먹으면 안되지~ 하는 외침이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 같아서… 역시 그냥 빈 손으로 왔어야 했다. 어흐흑.
나중에 집에 있는 체중계로 책 무게를 재어보니 2.1 kg이었다. 운반비라도 꼭 받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심지어 저 쇼핑백도 옆구리가 벌어져 있어서 양면 테이프로 열심히 붙여야만 했다!
#3. 유혹
사무실을 나와 선영님과 함께한 저녁과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계속 작업을 진행했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더불어 미션이 주어진 상황의 황당함과 ‘사장님은 외계인이다’ 라는 주제의 수다. 같이 갈 것 같은데, 확답을 안 주신다. 흔들리는 것 같은데 쓰러지지 않으신다. 어이구, 어찌해야 하나.
투덜거리며 무거운 책을 들고 집에 돌아와 있는데, 선영님께 문자가 왔다. 항공권도 여행상품도 아직 남아있는데 어 진짜 흔들린다신다. 어이쿠, 잘됐네. 잘 생각해보세요! 여행사에는 제가 알아볼께요!
다음날 오전에, 일단 여행사에 문의해봤다. 항공권과 호텔 자리는 아직 남아있었다. 선영님 맘 바뀌기 전에 진행해야 해! 하루동안 여행사와 선영님과 전화질과 문자질을 계속한 끝에 예약 완료. 아하하핫. 성공했다. 결제도 그냥 일단 내 카드로. 선영님 귀찮게 하면 안 돼! 되는대로 나중에 입금해 주세요~
이렇게 해서 미션에의 동반자가 생겼다. 아싸!
#4. 출발
그렇다고 무작정 가서 관장님을 만나자고 할 수는 없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 홈페이지를 찾아 대표 메일로 우리는 한국의 마쓰모토 세이초 팬인데 가서 관장님 만나뵙고 한국에서 출판된 책을 전해드리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영어로, 선영님이 일본어로 (난리법석을 치며) 써서 보낸 다음날, 바로 답장이 왔다. 관장님은 부재중이라 만날 수 없고, 책은 접수 데스크에서 사무실 사람을 불러달라고 하면 전할 수 있다고 한다.
미션의 80%는 수행한 느낌이었다. 하핫.
인천공항에서 선영님을 만나 (이번에는 파란 목도리!) 기타큐슈로 가는 제주항공편에 올라탔다. 출발 시간은 1월 1일 15시.
우리를 태우고 갈 비행기가 보인다. 제주항공이라 대표 색깔이 발랄한 귤색이다.
#5. 기타큐슈 도착
기타큐슈 공항에 도착하니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100주년 기념에 관련된 이런저런 흔적이 보인다. 한 도시의 관문이라는 공항에 대문짝만하게 걸어놓을 정도라니. 이 도시가 마쓰모토 세이초에 쏟는 애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공항 벽에 붙어있던 관련 행사 안내 포스터.
기타큐슈 공항 출발층에 들어서면 정면에 바로 보이는 마쓰모토 세이초 100주년 기념 공식 캐리커쳐. 공항에서부터 지켜보고 계셨던 거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두툼한 아랫입술이 강조된 재미있는 그림이다. 여행 내내 기타큐슈 시내 여기저기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기타큐슈 공항 1층 안내센터에 있는 메텔 인형. 사진에 보이는 마이크에 대고 일본어로 뭔가 물어보면 답해준다고 하는데 나의 저질 일본어 발음으로는 대화가 안되었다. 그냥 앞에 있는 터치스크린으로 해결해라 라는 답변이. 메텔 인형이 있는 이유는, 마쓰모토 레이지의 대표작 <은하철도 999>의 탄생지가 기타큐슈이기 때문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와 마쓰모토 레이지 크로스! 더블 마쓰모토 어택!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