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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from 이런저런 이야기 2010/05/25 00:28


확히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을 거야. 아마 다섯 살쯤이 아니었을까. 맥락상 여섯 살이나 일곱 살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냥 다섯 살이라고 할게. 어휴, 그럼 삼십 년이나 전의 일이네. 굉장히 추운 날이었거든. 12월이었으니까. 매년 12월 말일이 우리 엄마 생일이야.

요즘은 관계가 역전되는 바람에 은퇴한 아버지가 만날 엄마한테 구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아버지는 참 기세가 등등하셨어. 아버지 말이라면 엄마가 꼼짝도 못했지. 나는 매니큐어 바른 손으로 지은 밥은 안 먹는다, 이러시면서 엄마가 차린 밥상을 대차게 물리시던 기억이 나네. 그러니까 말년에 구박데기가 된 거예요, 아버지. 평소에 잘 좀 하시지.

아무튼 그날은 엄마 생일이었어. 집 안에서 유난히 무뚝뚝한 아버지가 딱히 무슨 이벤트를 준비했을 리 없지. 대신 티켓 한 장을 엄마한테 건네시더라고. 금강제화 상품권. 얼마짜리였는지는 모르겠어. 돌아보니 그 시절에 우리 엄마는 무척 검소했던 것 같아(지금은 전혀 검소하지 않아). 변변한 구두나 옷 한 벌도 없었지.

그날 저녁이야. 우리 모자가 오랜만에 같이 외출했던 건. 구의동에서 59번 버스를 타면 종로 2가에 있는 YMCA 앞까지 한 번에 갈 수 있거든. 약간 딴 얘긴데 나는 YMCA 아기스포츠단 회원이었기 때문에 종로 근방 지리를 잘 알아. 엄마가 뭐 먹고 싶냐고 해서 나는 우동이랑 김밥이 먹고 싶다고 했어. 크으, 추운 날에는 역시 우동 국물이 제격이잖아.

지금도 그대로인지 모르겠지만 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보면 금강제화 매장이 있거든. 엄마와 나는 추위에 곱은 손을 꼭 잡고 종종거리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어. 멀끔하게 생긴 청년 한 명이 살갑게 인사를 하더니 엄마를 소파에 앉혀놓고 여러 가지 구두를 보여주더라. 마침 창 밖에는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엄마 멀었어? 나 배가 몹시 고파.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아들. 말은 그랬지만 조금 기다려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어. 뜸 들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압력밥솥 같은 표정으로 구두 하나를 들고 아까부터 고심하는 기색이었거든. 빨간색 구두가 아니었나 싶어. 내가 보기에도 썩 예뻐 보이긴 했어. 어라, 근데――,

미안합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한참을 망설이던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빈손으로 매장을 나서는 거야. 왜 안 샀냐고 물으니까 그냥 웃기만 하시데.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우동이랑 김밥을 시켜 먹었어. 그게 전부 얼마였을까. 당시 자장면 값이 육백 원이었으니까 다 해 봐야 이천 원 정도? 삼천 원쯤 됐을까.

저녁을 먹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어. 아버지가 아직 퇴근 전이라 나는 안방에서 TV를 봤지. 그러다가 잠들었나봐. 아니, 잠들락 말락. 그런데 엄마가 이모랑 통화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엄마 목소리는 나직했고 나도 잠결이어서 전부 다 또렷하게 들렸던 건 아니야.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더라고. 엄마가 왜 구두를 안 샀는지.

글쎄 내가 상품권이랑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나갔거든. 근데 맘에 드는 구두를 사고 나면 딱 차비뿐이 안 남지 뭐니. 호호호. 홍민이한테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는데 구두를 사면 딱 차비만 남잖아. 쯧, 그래서 안 샀어. 담에 사면 되지. 그래, 고마워. 형부는 아직 안 들어왔지. 별일 없으면 내일 밥이나 먹으러 와라 얘.

헌데 참 이상하지. 사실 그날 잠결에 들었을 때는 전혀 감흥이 없었어. 그러다가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서, 며칠 전 어버이날에 그 일이 생각나더라고. 실은 우리 형제들이 돈을 모아서 지난달에 엄마 환갑기념 해외여행을 보내드렸거든. 그 돈 마련하느라 이번 달에 적자라며 엄살을 떠니까 엄마가 농담처럼 그럼 내 생일에는 회사에 에어컨을 사준다느니 뭐 그런 얘기를 했는데――,

그때 문득 어린 시절 엄마랑 손을 잡고 구두를 사러 갔다가 그냥 돌아왔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르더라. 환한 조명을 받으며 진열장에 놓여 있던 갖가지 구두들과,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가락국수의 얼큰한 냄새와, 나직하게 웃으며 통화하던 엄마의 목소리와, 무엇보다 당신이 한참 동안 들고 있던 구두, 그런 것들이 말이야.   

무슨 뻘쭘한 다짐을 하려고 그날의 얘기를 꺼낸 건 아니야. 왜 꺼냈느냐면 말이지, 오늘이 내 생일이거든. 근데 정말로 어제 에어컨이 도착한 거야. 그걸 보니까 문득 궁금해지더라고. 엄마는 나중에, 나중에 그 빨간 구두를 샀을까. 글쎄. 모르겠어. 까짓 물어보면 되지만 그런 걸 물어본다는 생각만으로도 으으으 어쩐지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우리 엄마가 올해 환갑이니까 삼십 년 전이면 서른. 음. 지금의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던 거잖아. 엄마, 그럼 엄마는 스물다섯에 나를 낳은 거유? 되게 빨리 낳았네. 그래서 나보고 자꾸 결혼 늦게 한다고 잔소리하는 거구나. 엄마도 참.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요즘에는 다들 늦게 한다고. 걱정하지 마셔.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나저나――,

에어컨 잘 도착했어. 내가 응원하는 엘지 거네. 잘 쓸게. 고마워.

                      아우와 엄마와 나(고놈 참 몬되게 생겼다ㅎㅎ), 아기스포츠단 소풍날인 듯.

덧) 오늘은 이몸의 탄생일인 관계로 화요일 연재를 쉽니다. 대신 제가 다음 주부터 열심히 쓰라고 동료들을 채찍질하겠사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