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처음 대면한 게 언제였더라, 하고 머릿속을 더듬어 본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를 펴내고 몇 달 후였을 것이다. 성대 국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천정환 선생의 요청으로 특강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장르문학 출판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한 후에 학생들에게 《혼조》를 나눠줬던 기억이 난다.

강의를 마친 후, 우리 둘은 가회동에 있는 호젓한 요릿집을 찾았다. 예전부터 나에게 꼭 한 번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인문학 편집자인데 소설을 많이 읽고(이 대목에서 천정환 선생은 소설을 전공한 자기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이, 라고 덧붙이며 웃었다), 최근 들어 미야베 미유키에게 빠져 있는 사람이란다.   

더운 날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짬뽕 국물이 나올 때쯤 등산배낭을 맨 남자가 가게 안으로 선뜻 들어섰다. 젊었을 때는 잘생겼다는 얘기깨나 들었으려나. 하지만 뿔테 안경 때문이었는지, 전체적으로는 예민하고 고집이 셀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이 더운 날 굳이 자기는 소주를 먹겠단다.

미야베 미유키 얘기를 잠깐 하고 그 뒤로 두어 시간은 야구 얘기만 했다. 당시 나는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야구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문득, 이대호 알아요? 하고 묻는다. 이대호 씨? 두산 4번 타자? “……아닌가요?”라고 대답했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찬다. 이대호가 두산이라니, 이 친구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피식, 이라고 했던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게. 그것이 모비딕 조원식 실장과의 첫 만남이다. 나에게 그는 고집 센 야구광 정도로 인식되어 있었다. 틀림없이 위는 부실한 사람일 거라고 나중에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날도 안주는 거의 먹지 않고 소주만 잔뜩 먹었거든. 반대로 나는 술은 거의 먹지 않고 안주만 집어먹었지. 그와 나는 배짱이 맞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어 보였다.

2008년 여름 무렵이니까 시간이 어느새 오 년이나 흘렀구나. 그 뒤로 나는 이대호 선수를 눈 여겨 보았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조금씩 정이 깊어만 가서 지금은 이대호 선수를 무척 좋아하기에 이르렀다(성균관대학교도 좋아합니다). 조금 진부한 말이지만, 그러고 보면 인연이란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아까 천정환 선생이 전화를 걸어, 《경향신문》에 실린 세이초 기사 봤는데, 그거 지나치게 크게 실린 거 아니야? 크하하 맙소사, 하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며 놀리기에(라기보다는 전화니까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는 걸 볼 수야 없고 하여튼 그런 뉘앙스로 웃기에), 에이, 선생님은 세이초도 잘 모르시면서 왜 함부로 말씀하셔, 라는 의미를 담아 같이 웃어 주었다.

세상 어떤 책에 사연이 없겠냐만, 오늘 세이초 월드는 그런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들은 하나도 그렇게 여기지 않겠지만, 나는 참으로 묘하다고 느낀다. 미야베 미유키+이대호+성균관대학교=마쓰모토 세이초. 써놓고 보니까 정말 그래. 아아 일본으로 건너간 이대호 선수의 선전을 기대해 보고 싶은 일요일이다. 오늘따라 날씨도 좋구만.

왼쪽부터 김경남 선생, 나, 조원식 실장


덧) 후지이 관장 인터뷰 건으로 일본에 갔을 때 찍은 사진 가운데 제일 내 마음에 드는 거. 촬영은 야쿠자 출신 포장마차 주인 아저씨.


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제목을 짓는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곤 하지만,
그에 관련된 유명 작가들의 토로를 마주하다 보면
이게 나 혼자 겪는 어려움은 아니구나 싶어 안심이 되기도 한다.

가령 이러한 토로,
"마음에 드는 제목을 갖고 있는 작가라면 모름지기 그것을 아끼고,
쓸모없는 제목 두세 개를 먼저 제시하여 편집자로 하여금 딱지를 놓도록 할 필요가 있다.
편집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마음에 드는 제목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다
. (찰스 포스터)"

혹은 이런 거.
"세상에서 이름 붙이기가 가장 어려운 게 단편집이다.
독자의 눈길을 끄는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고,
맞춤하면서도 책 내용을 포괄하고,
오 헨리의 소설 제목을 재탕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허약하고 감상적이며 맹하지도 않은 제목이어야 하는 것이다. (스콧 피츠제럴드)"

최근에는 이게 가장 흥미로웠어.
"내 소설들은 어떤 것이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농담>,
또는 <우스꽝스러운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그 제목들은 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밀란 쿤데라)" 

독자들에게는 큰일날 소리로 치부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제목을 짓는다는 건, 제목이란 건,
처음 들었을 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느낌만 들지 않으면(설사 그게 마음에 안 들어도) 
만사 오케이인 게 아닌가 싶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주니까.    
뭐 그렇다고 앞으로 그러한 자세를 고수하겠다는 뜻은 아니구요.

그건 그렇고 
일전에 진행한 활자 잔혹극 이벤트(http://www.booksfear.com/455)에 응모해 주신 분들.
이벤트를 걸어놓고 경황중에 저도 잊고 말았어요.
그 사이에 많은 분들이...라기보다는 몇몇 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원하셨더군요.  

dangko 님, 씨비스킷 님, momosee 님, 뒹굴뒹굴 님.

모두 고맙습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지원하신 모든 분들에게 이번에 나올 미미 여사님의 신간 <말하는 검>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래 비밀댓글로 네 분 전원 열외없이, (우편번호가 포함된) 주소, 이름,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혹시 대견스럽게도, 이미 <말하는 검>을 예약 주문하신 분은,
북스피어에서 나온 다른 책을 고르셔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우편번호를 적지 않으시면 책을 보내지 않겠어요.
이상.






터뷰는 지난 주 월요일에 했다. 11시부터 2시 40분까지. 밥도 안 먹고. 쉬는 시간도 없이. 원래 에스프레소 노벨라 1권 『위대한 탐정 소설』의 서문 때문에 만났던 거지만 최종적으로 마쓰모토 세이초가 기사화됐다. 자칫 곤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겨레 북섹션은 토요일이니까 그날 기사화가 되겠거니 여겼다. 기사는 목요일자에 실렸다. 목요일 아침에 중국 시안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나눠준 신문을 읽던 일행이 "어, 한겨레에 너네 기사 났다"고 알려주어 나도 엉겹결에 확인했다. 모비딕이랑 우리끼리 툭탁툭탁 일을 진행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신문에 나니까 기분이 묘하다.
 
옮겨놓는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00550.html



아울러 에스프레소 노벨라와 관련하여 실렸던 기사들도 뒤늦게 옮겨놓는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99834.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0071927415&code=900308






마쓰모토 세이초 컨소시엄이나 에스프레소 노벨라 기획이나, 겉으로는 "내 맘대로 하겠다"느니, "재밌으니까 한다"느니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포즈를 취하고는 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기획이기도 해서 속으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렇게 기사화되니까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듯한 느낌도 든다. 다행이다. 한숨 돌렸다. 구본준 기자, 박현주 씨, 임종업 기자, 주영재 기자 덕분이다. 감사드린다.

지난 주에 중국에 잠시 다녀왔다. 관광이나 여행이 아니라 오로지 세이초와 노벨라의 향후 나아갈 바에 대한 구상을 위해서 다녀온 거라고는 절대 말 못하지만, 오랜만에 복닥복닥한 생활에서 벗어나 좀더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해 주시길 바란다. 
 

내년 정국 구상중. 중국 시안에서



덧) 이번 달과 다음 달에 한겨레에서 출판 강의가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살펴보시길.
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1&tolclass=0001&searchword=&subj=F90556&gryear=2011&subjseq=0003 
(신촌)
http://www.hanedu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2&tolclass=0002&subj=B90742&gryear=2011&subjseq=0004&booking= (분당)

 


사가 끝나고 나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서
화요일 수요일은 빈둥빈둥 놀았습니다.
후기고 나발이고 만사가 귀찮더군요.
지금도 귀찮긴 마찬가지지만, 보고 차원에서 짧게 씁니다.

반품은 총 2500권 들고 나갔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밴딩된 책들이 전부 서점에서 반품된 책들입니다.
작년에는 2000권쯤이었는데 올해는 반품이 늘었습니다.
말이 2500권이지 처음에는 이걸 언제 다 파나 싶어서 암담하더이다.


현수막 이벤트에 당첨된 Shoo 님이 영광스럽게도 북스피어 부스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VIP 대접을 받으며(맞지요, Shoo 님?)
느긋하게 마음껏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책을 고르셨고요.
사진 촬영도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첫날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북스피어가 들고나간 책은 첫날 거의 다 소진되었고
이튿날 부랴부랴 사무실에 있던 재고까지 가져갔지만 역부족.
마지막날에는 부스 위에 올려놓을 책이 없었습니다.



삼 일 내내 피니스아프리카에 출판사가 북스피어와 같은 부스를 사용하였습니다.
피니스아프리카에는 장르문학 팬이었던 독자가 직접 차린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입니다.
첫 책 <스틸라이프>가 좋은 반응을 얻었지요.
와우북에 가지고 나온 책도 완판했습니다. 오~ 완판!



올해 행사 때는 많은 독자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각종 식량 조달을 비롯하여 
특히 놀러왔다가 팔을 걷어부치고 직접 판매에 나선 독자분들,
이건 상당히 희한한 광경이었는데...

저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북스피어 현상'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즉 어떤 얘기인가 하면,
북스피어 부스에 왔으니 A독자는 '북스피어 부스니까, 이런 것쯤 당연한 일이지'라며 마치 자신이 출판사의 직원인양 책을 팔기 시작하고, B독자 쪽도 '북스피어 부스니까 독자가 책을 팔고 있는 거야 별로 낯선 모습도 아니지'란 식으로 무심하게 쳐다보면서 책을 구입하는 것이지요. 물론 어쩌다 가끔은, 왜 출판사 부스에서 독자들이 책을 파나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고 무심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무심한 척했지만 저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인데.. 
난시청 님, 선영 님, 스테파네트 님, 풍륜 님, 상큼민트 님, rsnowdrop 님, 키첼 님, 키안 님, 이방인 님...
고맙습니다.
그대들의 노고는 내 잊지 않으리다.


총 매출은 1200만원. 작년보다 25퍼센트 늘었습니다.
작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카드보다 현금이 많았다는 것과 마지막날 책이 모자랐다는 거.
만약 책이 모자라지 않았다면 50퍼센트 정도 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굳이 기록해 두는 이유는, 내년에 참고하기 위해서(내년에는 책이 모자라지 않게 충분히 비축을).

써야 될 얘기는 다 쓴 것 같은데.
아아 피곤해라.
고만 써야겠다.
이상.

덧)
온라인에서 신청해주신 지방독자분들.
제 게으름 때문에 책이 오늘 오전에 발송되었습니다.
빠르면 이번 주 내에 도착하겠지만 다음 주 월요일쯤 갈 수도 있습니다.
쏘리.

작년 와우북에서 반품된 미미 여사의 책을 우연히 싼맛에 구입했다가
급기야 미미 여사의 신도가 됐다는 독자분이
이번 와우북 때는 음료수를 전해주고 가셨습니다.
책 가격에 대해 불만인 분도 계시겠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http://www.booksfear.com/276 (그 아래 달린 리플)을 참조해 주시옵고. 

 



에 돌아와 비빔면 하나 끓여먹고,
이것저것 체크한 후에 (그 사이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돌렸다)
겨우 몇 자 적습니다. 
와우북 이야기는 행사가 끝나면 몰아서 쓰겠습니다.
오늘은 간략한 보고만.

1
첫날인 오늘 매출은 작년보다 좋았습니다.
작년에는 물론 비가 온 탓도 있지만,
제가 보건대 작년 북스피어 자리와 지금 있는 이 자리는
판매면에서만 보면 '따블 스코어'를 기록할 정도입니다.
덕분에 들고나간 책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2
일요일은 사무실에 '저장'해둔 책을 들고 나갑니다.
이 책들까지 투입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불과 하루 만에.
마감하고 사무실에 돌아와 체크해 보니
1일차에 들고나간 책의 사분의 일쯤 되는 듯합니다.

3
'북스피어 책 띠지의 비밀' 이벤트는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개장하자마자 마감.
아아 띠지를 꼭꼭 보관해두는 독자들이 이리도 많다니. 
뒤늦게 띠지를 들고왔다가 헛걸음하신 푸른하늘 님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진 찍는 데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유명한 작가라도 왔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더군요.
그래도 찍자고 하니까 냉큼 찍어주신 독자분들, 고마워요.
이십만 원으로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아울러 내일부터는 띠지 들고와봐야 '말짱 꽝'임을 알려드립니다.

4
마지막으로 내일 오실 분들께 당부의 말씀.
카드 말고 현찰! 오케이?


이상.


#1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 낯설게 들리는 이 이름은 우리에게 소설가로 더 유명한 밴 다인의 본명이다. 뭐 유명하다고 해도 요쪽 동네에서나 그렇지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는 원래 문예 평론가, 미술 비평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예술계에서 쌓은 명성이 실추될까 두려워 필명으로 탐정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탐정 소설이니 미스터리니 하는 장르에 대한 편견은 똑같았던 모양이다.

<위대한 탐정 소설The Great Detective Stories>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에세이이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미스터리를 많이 읽고 나만큼 주의 깊게 연구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라는 자신감을 방증하듯 굉장히 많은 작품의 인상비평이 실려 있다. 재미있게도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는 이 에세이에서, 밴 다인의 작품에 대한 평가도 슬쩍 집어넣는다. 분량이 많지 않아서 아쉽긴 했지만, 이 대목, 개인적으로 상당히 귀엽구나, 하고 느꼈다.

#2
<심플 아트 오브 머더>는 워낙 유명한 에세이니까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이 책의 제목에 대해 한마디만. ‘심플 아트 오브 머더’는 우리말로 옮기면 ‘단순한 살인 방법’이나 ‘간단한 살인의 기술’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인의 기술’, ‘살인 방법’이라는 말이 영 마음에 걸렸다. 요즘은 노랫말에 ‘술’이나 ‘담배’ 정도의 단어만 들어가도 제재를 받는 엄혹한 분위기 아닌가. 그런 와중에 ‘살인 방법’이라니 이거 잘못했다가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음을 고백한다.

혹은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앞에 앉은 아가씨가 우연히 제목을 보게 된다면 ‘사람을 죽이는 단순명료한 방법 같은 이상한 걸 읽고 있는 범죄형 인간’으로 치부하고 슬금슬금 옆 칸으로 자리를 옮길지도 모른다. 우리 나라는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보다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 같은 게 남아 있으니까 책 제목을 정할 때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렇게 어려운 영어도 아니고, 어감 역시 ‘살인의 기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세련돼 보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몇 날 며칠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머더’의 경우 이 책을 번역한 최내현 씨가 혹시 독자들이 ‘마더(엄마)’로 착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했으나, 에이, 영어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이 나라에서 그런 착각을 하는 독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고 설득해서 원제 그대로 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너무 무책임하게 지은 제목 아니냐고 격분하지는 말아 주시기를.  

#3
일본에는 문학상이 많다. 그중에서 현해탄 건너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상은 크게 아쿠타가와 상과 나오키 상 정도가 아닌가 싶다. 요즘에는 서점 대상도 있긴 한데, 논의를 얼른 진행시키기 위해서 그건 제외하자. 어쨌든 아쿠타가와 상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걸출한 인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으로 주로 순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수상하며 우리 나라에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었다.

한편 나오키 상은 대중문학 작가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인 상으로 나오키 산주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쿠타가와 상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상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궁금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은 한국에도 꽤 많이 번역이 됐는데, 어찌하여 나오키 산주고의 작품은 단 한 개도 번역되지 않았을까. 과문한 탓에 간과했을 수도 있지만 나오키 산주고의 작품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찾아보니 꽤 흥미로운 강의록과 단편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게 이 책을 만든 이유다.


이상의 세 작가로 ‘에스프레소 노벨라’ 시리즈를 본격 시작한다. 에스프레소 노벨라 0호에서 얻었던 교훈을 바탕으로, 가격을 낮추고, 아 몰라몰라 내 맘대로 만들기로 했다. 이 ‘아 몰라몰라 내 맘대로 만들기로’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구나 싶어 시리즈의 1권 <위대한 탐정 소설> 앞 발행인의 말에 구구절절 적어 놓았다. 매우 길고 지루한데다 심지어 억지스러운 부분까지 있기는 한데, 여튼 그간의 심경이랄까 반성이랄까 후회랄까 깨달음이랄까 하는 대목이 뒤죽박죽 섞여 있으니까 굳이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문고본은 한국에서 절대로 활성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여기다가 구시렁구시렁 적었다간 알게 모르게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만둔다. 내가 직접 체험해 본 게 아니기 때문에 근거가 박약하다는 이유도 크지만. 어쨌든 그 동안에는 틈만 나면 “문고본은 한국에서 절대로 안 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에스프레소 노벨라’라는 컨셉(이 아니라 ‘컨셉트’라고 해야 하지만)의 문고본 시리즈가 하고 싶었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에세이들이 눈에 밟혔고 ‘아아 이런 걸 자그마한 형태로 만들면 재미있겠다’ 싶었을 뿐이다.

시리즈의 생명은 방향성이고 방향성은 목록을 결정하는 순간 명징하게 드러난다고 어느 평론가가 그러던데, 이 시리즈는 방향성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 없다. 아니, 살짝 있긴 있는데 밝히기가 좀 애매하다. 이번에 나온 세 권을 찬찬히 살펴보면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본다. 짐작하지 못하겠으면 말고.

새롭게 시작하는 ‘에스프레소 노벨라’는 나에게 있어 작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시리즈를 비롯하여 북스피어는 또 다른 재미있는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영차영차 준비중인 기획은 올해 연말이나 내년 초쯤 그 전모가 드러날 터인데 다음 주 중에 이와 관련하여 포스팅을 할 계획이다. 이몸은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여러분들은 어떨지. 나와 같은 심정이라면 살짝 환호작약해 주시길.

덧)
001. 위대한 탐정 소설_3,800원
002. 심플 아트 오브 머더_3,800원
003. 나오키의 대중 문학 강의_4,800원

뼈를 깎아서 만든 가격, 오케이? 그니까, 좀 사줘덜.

(인터넷 서점에서는 현재 절찬리에 판매중이고, 오프라인은 주말에 깔린다.)  

이하 광고.

위대한 탐정 소설


예술 평론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 아니,
추리 소설가로 더 유명한 밴 다인의 추리 소설 약사略史.

『위대한 탐정 소설』은 오래된 글이다. 그러나, 아니 그러하기에 더욱이, 재미로 승부하는 글이기도 하다. 저자인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의 말마따나, 탐정 소설은 얄팍한 성격을 숨기지 않는 장르다. 진지하고 심오한 접근이 도리어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팔십여 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무색하게도, 이 글은 놀랄 만큼 쿨하다. 탐정소설이 정신적 유희거리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언하는가 하면, 치사한 표현까지 동원해 가며 소위 ‘문학적’ 탐정 소설을 조롱한다. 그러니, 고전의 향기라느니 교과서적 작품이라느니 하는 수식은 집어치우자. 이 글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수많은 탐정 소설들 또한 그러한 수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보통 먼 것이 아니다. _역자 후기 中에서


심플 아트 오브 머더


애거서 크리스티, 밴 다인, 코난 도일… 그 모두가 나에게는 불충분하다.
하드보일드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첫 번째 에세이.

“코난 도일도 전체 스토리를 무너뜨리는 실수들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구자로 남았고, 셜록 홈즈는 특유의 태도와 불멸의 대사들로 기억된다.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설정도 있다. 영리한 벨기에 사람인데 초등학교 수준의 직역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그는, ‘작은 회색 세포’를 조금 굴린 후 열차 침대칸의 그 누구도 혼자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으므로 모두가 함께 저질렀다고 결론을 내리고, 마치 달걀 거품기를 조립하듯 일련의 간단한 작업들로 살인 가정을 분석한다. 아무리 영민한 독자라도 여기선 머리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런 추리는 바보만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_레이먼드 챈들러


나오키의 대중 문학 강의



일본 대중 문학 최고의 상인 나오키 상은 바로 이 사람, 나오키 산주고가 대중 문학에 기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일본 대중 문학의 선구자 나오키가 진단한 일본 문학과 세계 문학. 그가 말하는 “대중 문학,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일본의 대중 문예는 그 범위가 아직 지극히 좁고, 곡괭이가 닿지 않는 분야는 더욱 귀한 금광을 숨긴 채 그대로 우리의 발밑에 넓고 깊게 누워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을 개척해 나가는 일이야말로 대중 문예 작가의 임무이며, 대중 문예를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이다.” _나오키 산주고


 


 다음에 나이가 들면 뭘 해보고 싶은가. 뜬금없지만 가끔 멍하니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연휴를 앞두고 있는 오늘 같은 날. 여튼, 그래서, 뭘, 해보고 싶은가. 근사한 출판사 건물 일층에 빵집을 차려, ‘빵집 주인’만큼은 반드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째서 빵집 주인인가 하면 물론 내가 빵을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라는 건 너무 재미없으니까 거기에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여 볼 테니 들어보시라.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스무 해도 훨씬 더 전에, 그러니까 내가 여덟 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다른 몇몇 가족들과 함께 매해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곤 했다. 부모님들이 대부분 같은 연배여서인지 자식들도 거진 비슷한 또래였다. 그중에 ‘샛별’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와는 동갑. 피아노를 잘 쳤고, 그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절친한 술친구여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부 동반으로 자주 만나곤 하셨다고 들었다.

샛별이네는 빵집을 했다. 나는 꼭 한 번 아버지를 따라 그 빵집에 간 적이 있다. 구의역 어디쯤에 위치한, 테이블이 세 개 정도 놓인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와 내가 단 둘이 그곳을 찾았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다만 “많이 먹어라” 하며 아저씨가 건네주시는 빵이 무척이나 달았던 기억이 있다. 아저씨는 저쪽 구석에서 아버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셨고, 나는 샛별이와 마주 앉아 빵을 먹었다. 아니, 나만 먹었다.

우리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고작 “맛있어?”와 “응” 정도였던 것 같다. 소보루 하나와 크림빵 하나를 나는 묵묵히 먹었다. 다니던 학교 얘기 정도는 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다 먹고나자 그 아이가 또 묻는다. “더 줄까?”, “아니”. 잠시 후 얘기를 끝낸 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고 빵집을 나섰다. 아저씨는 “또 오너라”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그 아이는 “잘가” 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 불현듯, 나는 그 빵집에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음뿐, 거리가 멀고 지리도 잘 몰랐다. 혼자 가는 게 겁도 났다. ‘어떻게든 구의역 근처로 가면 되지 않을까’.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네 통장 아저씨의 아들이었던 성호를 꼬셔서 찾아가 보자고 마음먹었다. “빵, 배터지게 먹게 해줄게”. 그저 착하기만 했던 성호와 나는 걸어서 구의역으로 향했다.

길은 멀었다. 게다가 코흘리개 꼬맹이 둘이 위치도 모른 채 찾아가는 초행. 몇 번이나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몇 시간인가를 헤매야 했다. 끝내 낯익은 장소에 다다르긴 했다.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길만 건너면 빵집이었다. 하지만 안에는 아저씨도 그 아이도 없었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아가씨 혼자 분주하게 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냥 돌아가자”... 그저 착하기만 했던 성호가 이렇다 할 토도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은 더 멀었다.

나중에 동생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우리가 사라진 동네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수상한 남자를 따라 갔다는 말이 돌았고 경찰이 출동했다. 아이 둘을 찾기 위해 이웃 주민들이 동원됐고 어머니는 내내 조바심치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자정이 다 될 무렵에야 우리는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와 성호는 따로따로 끌려갔다. 방문을 걸어잠근 어머니의 표정에는 살기가 돌았다.

그렇지만 빵집에 갔다왔노라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빵을 먹기 위해서였다는 말을 하는 게 창피했다기보다, 나중에 그 아이가 전말을 전해 들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얼마나 창피할 것인가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적당히 둘러댈 주변머리도 없었던 나는 변명 한 마디 하지 않고 한참을 맞았다. 어머니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빗자루가 반토박이 될 즈음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행선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새삼 가족들에게 물어봤자 아무도 기억할 수 없을 테지만, 나는 그때의 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길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빵집의 찬란한 불빛과, 진열장에 놓여 있던 먹음직스러운 빵들과, 늦은 귀가길 동네 어귀에 모여 있던 어른들의 웅성거림과, 살기등등했던 어머니의 눈초리와, 무엇보다 그 철부지 아이가 끝끝내 말하지 않았던 늦은 귀가의 이유,

그래서 나는 가끔 '이 다음에 나이를 먹으면 빵집을 차리자'라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같이 여름휴가를 보내던 가족들은 왕래가 없고 아저씨와 아버지도 더 이상 만나지 않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그 아이의 소식은 이제 알 길이 없다. 앞으로도 줄곧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언젠가 내가 빵집을 열면, 한 번쯤 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덧) 왼쪽이 나, 오른쪽이 샛별. 예전에 썼던 글인데, 얼마전 가족모임에서 앨범을 들추다가 사진을 발견했다. 한복도 입은 김에.... 추석을 맞아 겸사겸사 인사도 드릴 겸 재미 삼아 올려본다. 명절 잘들 보내시길. 그리고 친구야, 잘 살아라.



 


써 이 년쯤 전의 일이다. 평화롭던 어느 오후,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출판 창업에 대해 강의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변정수 선생이 기획한 책의 한 꼭지로 뭔가를 끼적인 것이 계기로 작용한 듯했다. 적극 추천까지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냉정한 분이니까)지만 ‘그 친구 정도라면’ 하는 식으로 선생이 언질을 주었던 모양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게 출판계의 존경할 만한 선배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긴 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말을 못하는 성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마당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출판이 어떻다느니 말도 안 되는 예를 들어가며 누굴 가르친다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깨끗이 단념하도록, 싱싱한 무를 식칼로 싹둑 자르듯 거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방도 보통이 아니어서, 말미를 줄 테니 생각해 보면 어떠냐는 둥, 내일쯤 사무실로 찾아오겠다는 둥, 일단 한 번 만나서 얘기하자는 둥 한치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만나는 거야 뭐 어렵겠나 싶어 약속을 잡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일단 한 번 만나자’고 마음먹은 순간 이미 4할5푼쯤은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간 게 아닌가 싶다.

약간 딴 얘기지만 뭔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한 번 만나’고 볼 일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만나서 “어머, 말씀도 참 잘 하시네” 하는 얘기를 다섯 번쯤 듣고 났더니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어흠, 그럼 한 번 해볼까나” 이러고 말았던 거다. 단, 마지막 강의를 마친 이후에 수강생들에게 평가서를 적어내게 해서 반응이 나쁘면 관두는 걸로 하자는 다짐을 두었다. 뭐 평가가 나쁘면 다짐을 두지 않아도 자동 태그일 테니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강의는 일주일에 한 번, 4주 동안 진행된다. 그런데 몇 번 하다 보니 사람들과 만나서 출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나에게도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했던 출판 행위들을 곰곰이 돌아보는 계기가 될뿐더러, 현재 출판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일들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간혹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내가 잘 모르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자극이 되고, 수업이 끝난 후에 어울리다가 뜻밖에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은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그 시간이 무척 기다려지기도 한다. 다행히(라고 해야 할지) 아직까지는 수업 내용에 대해 이렇다 할 불만이 접수되지 않은 관계로 이 년이나 부끄러움도 모른 채 출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다.  

물론 불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번째 기수인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여름이었고 마지막 수업을 했던 날로 기억한다. 종강을 기념하여 맥주나 한잔할까 싶어 근처 호프집으로 몰려가서 생맥주와 치킨을 시켜놓고 왁자지껄 떠들던 중이었다. 내 앞에는 자매님 세 분이 앉았는데, 그중 가운데 있던 분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내 옷차림에 대해 요모조모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아, 내가 그랬던가, 하고 성찰할 틈도 없이 양 옆에 자매님들까지 덩달아 (돌이켜 보니 약간은 기분이 나빴다는 표정으로) “맞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농담처럼 튀어나온 나의 복장에 대한 얘기는 주변으로도 전파되어 세 분 자매님 외에도 두 분의 형제님까지 끼어들어 열띤 성토의 장이 되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사 주 내내 매번 검정색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었어.
2. 심지어 티셔츠의 상표까지 똑같던데.
3. 이건 수강생들을 무시하는 처사 아닌가?
4. 그러고 보니 머리 모양도 이상해.

헤어스타일에 관해서까지 비난이 이어진 건 좀 억울했지만, 아닌게아니라 옷차림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긴 하다. 이런 말은 창피한데 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럴듯한 옷을 사본 적이 거의 없다. 겉모습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구렁이인 척 담을 넘으려는 게 아니고, 내가 오랫동안 옷을 사지 않았던 데에는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다. 간단하게 정리해 볼짝시면-.

옷가게에서 옷을 살 때는 분명 마음에 들었는데 집에 와서 입어 보면 도통 입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그렇다고 반품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옷장에 처박아둔다-->두 번에 한 번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쿼드 미사일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점원이 있는 가게에 가게 되는데 “어머, 손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라는 얘기를 들으면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쩐지 사게 된다-->그렇다고 반품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옷장에 처박아둔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간만에 옷가게에 들러 옷을 사면, 살 때는 마음에 들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이런 패턴이 몇 번쯤 반복된 이후로는 옷을 사러 갈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혹은 사더라도 무늬나 문양이 없는 무채색 티셔츠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 흰색 티셔츠로 귀결되지 않은 게 어딘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옷차림 때문에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니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리겠다. 

심지어 다음날에는 그날의 성토에 참여했던 형제자매님들로부터 메일도 왔다. 옷을 잘 입는 요령, 옷을 살 때는 가급적 직접 고르지 말고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통째로 사라는 조언, 그런 마네킹이 즐비한 대형 매장 위치, 옷 잘 입는 모델 사진 몇 장, 그리고 미용실 약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한편으로 그제야 비로소, 어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이 결코 술자리 농담이 아니었구나 하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 이후로 수업이 있는 날은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래봤자 네 번 가운데 한 번 정장을 입는 정도이긴 하지만. 

덧) 지난 주에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강좌를 하나 들었는데 그날 강사님이 꼭 나처럼 입고 나오더라. 목 늘어난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 강사님께 메일을 하나 드릴까 고민중이다.


 

 

 

 







분노의 또 한 가지 속성에는 ‘자기애적 분노’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태생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이 소중하고 특별하고 선하고 정당한 사람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자기 이미지가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를 자기애적 분노라고 한다. _김형경




들 잘 들어가셨는지요.

그날 저는 자정 넘어 귀가했는데,
들어오자마자 뻗어서 정신없이 잠들었습니다.
자기 전에 ‘주목할 만한 솔루션, 제로정’을 복용했지요.
제 몸뚱이 챙길 정신은 있었나 봅니다.

우리가 한 작업량을 따져봤습니다.
아홉 명이 일만 오천사백구십육 권을 일천구백삼십칠 세트로 만들었고,
빠른 열시에 모여 마무리가 된 시간이 늦은 열시 정각이니까
이 작업에만 꼬박 열두 시간 가까이 쏟아부은 셈이 되네요.

열두 시간 작업이라니. 게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주말을 날려버리고, 일요일에도 고생하셨지요?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제가 끙끙댈 정도였으니
다른 분들의 사정이야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작업을 하면서 이상했던 것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작업량을 소화하면서도
아무런 불만 하나 표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는 이게 심히 걱정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일개 출판사의 꼬임에 빠져
달랑 책 한 권에 주말을 혹사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마땅히 괘씸해 해야 할 일이에요. 암, 그렇고말고.

그날의 고통을 되새기며 분노하십시오.
그래야 본사도 정신을 좀 차리지 않겠습니까.
또한 향후 순진한 독자들이 이런 꾐에 빠지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화를 내세요. 


덧) 아아 그 와중에 사진 찍자니까 손 흔들고 있다. 이런 전시행정적 포즈까지 취하게 해서 진짜 죄송ㅠㅠ.


 


전에 북스피어 생일맞이 선물 보내기 이벤트를 한 적이 있다.
무리수였다고 생각하면서 포스팅했는데
뜻밖에 근사한 선물들을 보내주셔서 감격하고 말았다.
그중에 '묘한' 선물이 하나 있었다.


이 편지를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을 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밝히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감사한 마음에 애당초 약속하지도 않았던 책을 보내드릴 테니 주소를 알려주십사 부탁했더니 회식을 하기 전에는 알려주지 않겠다는 거다, 것도 매우 강경하게. 

그래? 그럼 엄청나게 비싼 데로 데리고 가서 골탕을 먹여주지.
그렇게 마음 먹고 홍대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참석자는 이번에 근사한 엽서 일러스트를 그려주신 비나리 님과 당시에 선물을 보내주셨던 분 전부. <미인>이 나오는 금요일로 약속을 잡았다.


이런 음식이 막 코스로 주구장창 나오는데 괜찮겠어?
여덟 명이 술도 양껏 마셨으니 솔찮게 나왔을 터.
그렇게 놀리다가 마무리할 즈음 슬쩍 이몸이 비용을 계산할 심산이었다(정말인데요).
헌데 정작 본인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더 시키라는 거다(더 비싼 거 먹을걸).

얘기를 나눠보니 이분, 좀 사시는 분인 듯.
호남형 얼굴(가수 이적을 좀 닮으셨는데 본인은 시큰둥)에 성격마저 쿨하시고.
정말 진심으로 예전부터 본사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먹이고 싶었다고 한다.
도저히 내가 계산할 분위기가 아니었어.

결국 계산은, 호남형 얼굴에 성격마저 쿨하신 분이 하셨다.
되게 많이 나왔는데.
약간 송구.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날 이몸이 약속이 하나 더 있어서 2차도 못 가고 말았다.


과장님, 그날 너무 잘 먹었어요. 책은 명함에 적힌 주소로 보내면 되지요?('직접 살란다' 이러지 마시고)
비나리 님, 딱 보기에도 더 달렸어야 했는데 2차를 못 가서 송구해요.
마녀 님, 무한도전 씨디 고맙고요(뭘 또 이런 걸 다), 아침부터 내내 '순정마초' 듣고 있어요.
승혜 님, 다음 번에는 우리 어린이책으로 조우하도록 해요.

독자 덕에 근사한 엽서도 만들고
독자 덕에 근사한 밥도 얻어먹고
간만에 몹시 즐거웠습니다.
성원에 힘입어 열심히 팔도로 하겠사와요.


덧)
아울러, <미인>은 오늘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이 가능합니다.

알라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931804&ttbkey=ttbreader762110003&COPYPaper=1
예스24 http://www.yes24.com/24/goods/5338305?scode=032&OzSran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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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파크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0000400000&sc.prdNo=208590595&bookblockname=b_sch&booklinkname=bprd_ti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