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bookeditor.org)라는 사이트가 있다. 이름만 얼핏 봐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듯 북에디터들이 드나드는 사이트다. 이곳 자유 게시판과 Q&A 게시판에는, 한때 편집자는 물론 예비 편집자들도 활발하게 드나들며 질문과 답변을 남겼더랬다. 헌데 요즘에는 뜸하다. 왜 뜸한지에 대해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얘기들이 있긴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므로 말하지 않겠다. 아무튼 뜸하다. 그런 와중에 여전히 성황인 공간이 있으니 바로 구인구직 게시판이다. 

연휴 다음날인 오늘, 구인구직 게시판에는 변함없이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모모한 출판사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공고’가 대부분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난리다. 이 취업대란 시대에 말이지. (가끔은 나도 이곳을 서성인다. 흠, 만약 북스피어가 망하더라도 나랑 내 동료들이 갈 데는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안도한다. 어허, 그냥 상상만 해 본 거다. 제발이지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please!!)

한쪽에서는 사람을 못 구해서 난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직장을 못 구해서 난리다. 다른 분야는 내가 잘 모르니까 거론하지 못하지만, 출판계에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대관절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말석에 있는 나 또한 상당히 궁금하다. 마침 얼마 전에 나온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부키, 2009년 9월)라는 책을 보니 출판평론가 변정수 씨가 이렇게 적어놓았다. 시사하는 바가 크므로, 길게 인용한다.

거칠게 말해, 대부분의 구직자들이 찾는 일자리의 성격과 대다수 출판사들이 필요로 하는 일손의 성격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출판편집자로 취업하고자 준비하는 사람들 중에는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고 실무 경험이 쌓여 가면서 능숙해지게 마련이거니와 책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심지어는 경력이 쌓여 가면서 숙련도가 높아질 테니 그에 따라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고, 나아가 당연히 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많은 대가가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유감스럽게도 책이나 영화 같은 문화 상품을 만드는 일에서는 이 두 가지 생각 모두 착각이다. 책 만드는 일은 처음부터 잘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 출판편집자로 살아남는다. 만일 경력이 쌓여 가면서 책 만드는 솜씨가 좋아진다면, 뒤집어 말해 예컨대 1년차 초보 편집자가 만든 책은 10년차 베테랑이 만든 책보다 완성도가 허술하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허술한 책을 읽어야 하는 독자는 어쩌란 말이며, 출판사를 믿고 원고를 맡긴 저자는 또 어쩌란 말인가. p. 239


아아, 실로 명쾌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제한된 지면을 통해 나름 압축해서 얘기하다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출판사에서 일하고자 이력서를 쓰고 있는 사람 중에서는, 뭐야 지는 뭐 처음부터 잘했다는 거냐, 하며 꼬투리를 잡고 싶은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출판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답이다(그러니 꼬투리를 잡고 싶은 분은 여기 말고 변정수 씨 홈페이지에서 잡아 주시와요). 그리고 말이 났으니 말인데, 변정수 씨는 이런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 처음부터 빌빌거린 내가 하면 곤란하겠지만.  

암튼. 책 만드는 일은 처음부터 잘 할 수밖에 없는 거다(꼬투리는 변정수 사이트). 출판계의 사정이 이렇다면 대체 어째야 하나. 제 손으로 책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꺾지 않는 이상, 내가 보기에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처음부터 잘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것. 다른 하나는 나처럼 창업하는 것. 후자는 약간 농담이고, 전자가 이 글을 쓴 목적인데…… 사실 뭔가 딱 부러진 비법이야, 당연히 없다.

처음 출판사에 들어가 편집 일을 시작했을 때, 공교롭게도 나에게는 ‘사수’가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벌써 한 달 전에 때려치고 나갔단다. 저자의 원고에 양손을 대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정성을 가득 담아 힘을 꽉 주면 ‘펑’ 하고 책이 만들어지는 줄 알았던 나는, 내내 좌절모드였다. 어쩔 수 없이 궁금증이 생기면 제작처와 그나마 안면 있는 출판사 선배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질문도 뭘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때, 제대로 된 질문을 하기 위해 『책 잘 만드는 책』(삼진기획, 2000년 11월) 을 열심히 들여다본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니 어언 8년이 지났다. 그 사이 출판 관련 서적도 꽤 많이 나왔다. 제작을 잘 하기 위해, 디자인을 잘 하기 위해, 편집을 잘 하기 위해, 혹은 창업자를 위한, 기획자를 위한, 편집장을 위한, 많은 책들. 그중에서 예비 편집자가 참고할 만한 서적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이 책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을 권하겠다. 출판 각 분야의 초보와 베테랑들이 솔직하게(하지만 우리는, 좀더 솔직했어야 하지 않을까)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주옥같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같이 말하면서 나는 몇 가지 사실을 고백해야만 한다. 이 책에는 나도 필자로 참여했다(부끄럽다). 게다가 책을 기획하고 조율한 변정수 씨와 친하기도 하다(출판계에서 내가 진정 선생으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얼마 전에는 담당 편집자들에게 술도 얻어마셨다(다음 번엔 당구도 같이 쳐준단다). 같이 쓴 필자들의 경우 몇 명은 원래 안면이 있었고, 몇 명은 술 얻어마실 때 만나서 친해졌다(미인은 없더라만). 그렇게 친해진 필자들이 와우북 행사 때 우리 부스에 와서 책을 왕창 사가기도 했다(아발론 연대기를 사간 당신은 정말 멋있었어). 그러니까 ‘주옥’이나 ‘재미’와 같은 진부한 명사들은 무시해도 된다(미사여구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을 뿐).

다만 예비 편집자들에게 권해주고 싶다는 바람에는 거짓이 없다. 어차피 고료도 다 받았기 때문에 책 더 팔린다고 인세가 들어오는 것도 아닌 마당에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다. 가격이 9,500원이니 혹시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자 꿈꾸는 사람은 꼭 사보기 바란다. 읽었는데 별로였다,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몸이 개인적으로라도 애프터서비스를 해 줄 테니까 걱정 마시옵고. 

덧) 내가 쓴 원고에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입고율과 출고율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는데(무의식적으로 갑과 을을 혼동해 버린 것이다), 나중에 이를 고쳐준 변정수 씨와 담당 편집자에게 엄청 '갈굼'을 당했다. ㅎㅎ 이 기회에 고마움을 전한다. 공개적으로 쪽 팔릴 뻔했다.

사례 1
일전에 내 아우가 어떤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은 번역을 아주 잘한 것 같아.” 무슨 책을 읽고 그러나 싶어 봤더니 북스피어에서 나온 일본 번역소설이다. 우리 책을 칭찬하는 거니까 일단 기분이 좋긴 했는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가 궁금했다. “응,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읽히더라구.”

사례 2
공교롭게도 며칠 후, 똑같은 책을 두고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은 번역이 좀 별로인 것 같아.” 번역이 별로라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도통 안 읽혀.” 잘 안 읽히는 이유가 번역이 별로이기 때문이라는 소리다. 재차 물었지만 딱히 다른 이유는 듣지 못했다. 


비단 일본 번역소설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번역소설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냉정한’ 평가가 눈에 띄게 늘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왜 그렇게 평가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상세히 밝혀놓아서 역자와 출판사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가타부타 평가도 없이 덮어놓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지적하는 독자들도 의외로 많다.

나는 이러한 평가가 직역과 의역에 대한 독자들의 ‘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주지하다시피 “원어에 충실”할 것인가, “번역어에 충실”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묵은 논쟁거리이고 여전히 진행중이며 앞으로도 딱 부러진 결론이 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많은 번역자들과 편집자들은 대개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면서도, 끝없이 고민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고민에 대해 이희재 씨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음부터 나는 포부가 컸다. 원문에 충실하되 한국어로서도 자연스러운 그런 번역을 하고 싶었다. 결코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다. 원문에만 얽매이는 직역이 ‘낮은 포복’이고 원문보다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중시하는 의역이 ‘고공 비행’이라면 나는 아슬아슬한 ‘저공 비행’이 좋다고 생각했다. 원문의 결을 어떻게든 번역문에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원문에 가장 가까운 표현을 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니 한국어의 구석구석을 보통 사람들보다는 자세히 들여다본 것도 같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 작가가 되어 한국어 자체만을 놓고 씨름했더라면 한국어의 개성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 일본어, 독일어 같은 외국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다 보니 한국어의 남다른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했던 한국어답다는 개념이 차츰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어가 이미 번역서를 통해 영어와 일본어에 상당히 깊이 물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번역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때부터 조금씩 바뀌었다. 이미 외국어에 많이 물든 한국어에 외국어 문체의 흔적을 더 남기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원문에서 멀어지는 고공 비행의 길로 날아올랐다.
_『번역의 탄생』/ 이희재 지음/ 교양인/ 2009년 2월


해당 문장의 앞뒤로 왜 저자가 직역에서 의역으로 비행방식을 바꾸었는지에 대한 근거와 과정 등이 적혀 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엄청나게 고민했을 터이고, 쓰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으리라. 저자도 밝혔다시피 정답이 없는데다 미묘하고 껄끄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미묘하고 껄끄러운가를 얘기해보고 싶지만 역시 미묘하고 껄끄러운 문제이니 만큼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권의 책을 두고 상반된 평가를 내린 두 사람의 사례에서 눈에 띄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둘 다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원어를 모르면서 번역의 질을 지적한 두 사람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두 사람의 ‘감상’이 번역 방식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례에서 예로 든 책에 오역이 없다는 걸 전제로 유추해 보자면, 이건 직역이나 의역의 문제라기보다 흔히 간과하기 쉬운 번역투의 문제가 아닐까. 두 사람은 문장의 좋고 나쁨(도 주관적인 판단이다), 혹은 문체의 호불호(특히 일본 번역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유의 표현 자체를 못 견뎌한다거나)를 번역의 문제로 규정해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문장의 질도 번역에 포함된다. 엄밀히 말하지 않아도 포함되겠지만.

‘번역투’라는 어정쩡한 단어를 써버리고 말았는데, 예컨대 복문이나 수동태, 입말의 문어체 등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굳이 번역어뿐 아니라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도 가급적 피하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사례로 든 두 사람의 ‘번역이 나쁘(좋)다’는 표현은 틀렸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오해의 소지가 남는다.  

대체로 독자보다 ‘약간’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편집자들(요즘에는 워낙 편집자 수준으로 실수를 지적해내는 독자들이 많으니까)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이것은 ‘교정ㆍ교열(도 물론 번역의 속한다)’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번역원고의 교정ㆍ교열 작업을 할 때 맞닥뜨리는 고민들도 이른바 ‘번역투’의 문장들을 어느 선까지 고쳐야 하는가부터 시작된다.

이때의 ‘어느 선’이라는 부분 역시 미묘한데 마침 안정효 선생이 『글쓰기 만보』(안정효 지음/ 모멘토/ 2006년 8월)에 잘 정리해 놓았기에 몇몇 대목을 옮겨본다. 다시 말하거니와 아래 인용한 대목들은 눈여겨봐 두면 일반적인 글쓰기에도 틀림없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제목은 임의로 정했고, 번호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1. ~것, 있다, 수

번역을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에게 처음 몇 달 동안 그들이 써놓은 글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라는 단어를 모조리 없애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킨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 세 단어를 문장에서 너무 자주 사용한다. 믿어지지 않으면 지금까지 써놓은 일기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에 모두 빨간 줄을 쳐보기 바란다. 자신이 쓴 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쓴 비소설류의 모든 글이 비슷한 지경이다.

‘있다’만 솎아내더라도 오히려 문장이 간결해져서 힘이 생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장을 다듬을 만한 자신감과 용기가 없어서, 긴 문장이 유식하다는 착각에 빠져, ‘간다’를 ‘가고 있다’라고만 해서도 안심하지 못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까지 한다.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표현을 놓고 생각해보자. ‘있다’는 맹장을 잘라내거나 썩은 이를 뽑듯이 그냥 없애버리면 된다. 그러면 “집으로 왔던 것이다”가 된다. 그리고 ‘것’도 가차 없이 자르고는 “집으로 왔다‘라고만 하더라도 작품 전체의 흐름에도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것’을 고치라 하면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것’이라는 단어를 ‘일’ 따위의 다른 단어로 바꾸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니까 나무를 가꾸면서 잎사귀만 어루만지는 격이다. 정원을 가꾸려면 때로는 나무를 통째로 뽑아버리고 새 나무를 심기도 한다. 문장의 나무도 마찬가지다. 수북하게 매달린 단어 잎사귀들 가운데 시들고 말라죽은 잎이 많으면, 아예 그 나무를 바꿔 심어야 한다. 그러니까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에서 ‘있다’와 ‘것’이라는 두 단어 잎사귀만 다른 단어로 바꿔 넣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아예 문장을 새로 쓰라는 얘기다.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라고 말이다. (혹은) “몸에 좋은 것이 시장에서 잘 팔린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는 ‘것’을 다른 단어로 바꿔 넣는 차원에서 머무르지 말고, “몸에 좋다 하면 무엇이나 다 잘 팔린다”라고 문장 전체를 아예 새로 쓰라는 뜻이다.

‘있다’와 ‘것’과 더불어 ‘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쓰기에서 ‘3적(敵)’으로 꼽힌다. “누전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라거나 “광우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영어에 중독된 귀에 자칫 ‘can'으로 들리는 이런 표현은 “누전을 일으키기도 합니다”라거나 “광우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라는 식으로 표현을 다양화하면, 우리 말 같지 않은 어색함이 사라지고 훨씬 자연스럽게 들린다.


 

2. 하나의 문장 속에 중복되는 어미와 토씨.

나는 글쓰기를 하면,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읽어보고는, 중복된 어미와 토씨를 일일이 걸러내어 고쳐놓는다. 예를 들면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에게서”라는 문장을 보자. ‘직장에서’와 ‘동료에게서’의 중복된 어미가 눈에 거슬린다. 그래서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로부터”라고 고쳐놓았다.

또 어미가 중복될 때마다 “나 길에”를 “나는 가던 길에”로, “좋 사람”을 “훌륭한 사람은”으로, “그렇게 말하”는 “그렇게 말하고 싶으며”로, “그러 너희 누구냐”는 “너희들 왜 그러느냐”로, “그러니 어떨”는 “그러니까 어떨지”로, “그래 보니”는 “그래서 가봤더니”라는 식으로 표현을 바꿔가며 변화를 준다. 그러면 단순히 이어지는 어미만 달라지지 않고 문장 전체의 획일적인 양상이 다채로워지면서 답답한 문장에 숨통이 트여 싱싱한 기운이 생겨난다.


 

3. 힘 빠지는 표현

“우리 제품은 확연히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아무리 봐도 그런 어정쩡한 ‘확연한 차이’를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지 어쩐지는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힘을 빼는 어법은 주체성과 자신감의 결핍 상태를 보여준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나'를 내세우지 않으려는 한국인의 겸손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4. 수동태

수동태여서 요즈음 가장 귀에 거슬리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뉴스보도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 “~라고 조사되었습니다”이다. ‘조사되었다’는 ‘조사해본 결과 ~한 사실이 밝혀졌다“라는 표현을 컴퓨터 언어로 기호화한 단어이다. 과거에는 이런 문장을 ”~라고 당국은 밝혔다“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사회적인 집단 정서와 언어문화가 여성화하기 시작하면서 선언적 책임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점점 모호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5. 지나치게 많은 접속사

45년 전 대학생이던 시절 처음 영어로 창작 공부를 시작한 무렵에 나는 루돌프 플레시의 『잘 읽히는 글쓰기』에서 정말로 놀랍고도 기막힌 교훈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이 써놓은 글에서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모조리 제거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고는 ‘그래서’와 ‘하지만’ 역시 제거하라고 했다. 막히기는커녕 오히려 청소를 끝낸 하수구처럼 모든 문장이 맑은 물소리를 내며 잘 흐르리라는 얘기였다.

 

덧) 그렇다면 과연 원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떤 책을 읽고 ‘번역이 나쁘(좋)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가 안 온당한가. 음,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  



써 몇 년쯤 지난 일이다. 어느 날 나는 끝내주게 재미있는 외서 하나를 ‘발견’했다. 편의상 그 작품을 A라고 하자. 친하게 지내던 기획자가 건네준 원고였는데, 절반 정도를 읽었을 때 이미 A를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은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날 바로 에이전시에 오퍼를 넣었다.

그때 내가 제시한 선인세는 한화로 300만원이 조금 안 됐던 걸로 기억한다. 통상적인 수준의 금액이었고 무난하게 계약이 성사될 줄 알았다. 객관적인 상황으로 봐서 도저히 경쟁이 붙는다거나 무리한 선인세를 요구할 만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이전시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경쟁이 붙었으니 ‘베스트 오퍼’를 넣으란다. 환장한다.

(여기서 ‘객관적인 상황’이라는 부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란 약간 곤란한데, 음, 우리는 결국 A를 계약하지 못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다른 출판사에서 우리가 제시한 금액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번역 출판권을 가져갔다고 들었다. 때문에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자칫 작품명이 밝혀지면 해당 출판사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나는 단순히 우리보다 더 높은 선인세를 제시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출판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베스트 오퍼, 즉 선인세를 올려서 다시 넣으란 소리다. 너네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를 불러보아요. 다른 출판사들이 얼마에 넣었는지는 모르는 상황이고.

해당 에이전시는 A를 출간한 해외 출판사와 ‘독점’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다른 경로(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출간을 타진할 여지도 없었다. 석연찮은 기분도 들고 찜찜하기도 했던 나는 상징적인 의미로 딱 10만원만 올려 다시 오퍼를 넣었다. 욕심은 나지만 안 되면 할 수 없다, 세계는 넓고 낼 책은 많으니까, 그런 기분도 조금쯤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우리는 처음부터 외서 계약에 대한 원칙이 있었다. 올리란다고 올리고 더 올리란다고 마냥 더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긴 나 역시 뭣도 모르고 달란 대로 다 줘야 되나 보다 싶어서 끙끙 앓던 때가 있기는 했지만.

당연히, 우리는 A를 계약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십 년쯤 전에 모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바로 절판된 책(은 편의상 B라고 하자)을 우리가 새로 계약하려고 하자 어느새 바람처럼 나타난 몇 군데 출판사와 B를 놓고 경쟁이 붙었던 기억도 난다.

공교롭다면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간도 아닌 마당에 오륙년 동안 잠잠하던 B에 어째서 하필 딱 그때 경쟁이 붙었을까. B가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그 기간에 B에 대한 소문이 돌았던 것도 아닌데 왜. 대관절 어째서.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그 출판사들도 오랫동안 기획해 왔던 거일 수도 있다. 내가 생떼를 쓰는 거일 수도 있다. 지 안목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지네가 계약만 하려고 하면 경쟁이 붙느냐며 혀를 끌끌 찰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동안은 거론하지 않았다. 허세를 부리려는 것처럼 보이고, 공연한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끼적이는 이유는, 어떤 책을 읽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책인고 하니, ‘팝헙 에이전시’의 대표이자 번역기획자로도 유명한 강주헌 씨의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라는 책이다. 그동안 강주헌 씨는 좋은 번역자이자 탁월한 기획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양반 확 그냥 존경해 버릴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예컨대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에이전트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대리인’에 가장 가깝다. 달리 말하면 해외 출판사를 대신해서 저작권을 팔아주고 관리해주는 대리인인 셈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보험대리인과 달리 독점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된다. 쉽게 말해서 좋은 값을 주는 소비자를 골라서 팔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소비자들을 모아놓고 경쟁을 붙인다. 심하게 말하면 ‘떴다방’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보다 더한 경우에 대한 소문도 떠돈다. 출판사에서 열심히 책을 찾아서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와 독점관계를 맺고 있는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저작권 확인을 부탁하면, 그 에이전시가 더 좋은 값을 제시하는 출판사를 물색해서 번역 저작권을 넘기는 파렴치한 행위를 한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천인공노할 짓이다. 이것도 독점의 폐해다.

  
현직 에이전시 대표가 굳이 ‘소문’이라는 용어까지 에둘러 써가며 동종업계에 대해 날린 뼈아픈 일침이다. “출판사에서 열심히 책을 찾아서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와 독점관계를 맺고 있는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저작권 확인을 부탁하면, 그 에이전시가 더 좋은 값을 제시하는 출판사를 물색해서 번역 저작권을 넘기는 파렴치한 행위를 한다는 소문도 들려온다”는 바로 이 대목.

마치 내가 겪은 사례를 토대로 쓴 문장이 아닐까 싶은 만큼, 똑같다. 나는 강주헌 씨가 백퍼센트 사실을 토대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내부고발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약간이라도 과장의 여지가 있거나 정말로 소문에 불과할 따름이라면 결코 이렇게까지 쓸 수는 없었으리라 본다.

외서 계약에 대한 추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느새 위험수위를 넘어 버렸다. 그렇다면 사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제동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동종업계 종사자들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하겠다.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런 만큼 에이전트로서 그가 가진 신념은 확실하다.

에이전트는 해외 출판사의 대리인이다. 따라서 해외 출판사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이 존재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인세를 많이 받아주는 것만이 해외 출판사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출판사에게 적정한 가격의 선인세를 요구하고 그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을 해외 출판사에 안겨준다. 물론 에이전시는 우리나라 출판사가 정직하게 인세보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일 뿐이다. 오히려 에이전트로서의 진정한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단방에 크게 먹고 끝내자는 심보와 다를 바 없다.


척 보기에도 간지가 절절 흐르는 신념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담긴 강주헌 씨의 신념이랄까 생각이랄까 하는 부분도 훌륭하다고 여겼지만, 그보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용기 있게 밝힌 그 부분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책까지 냈으니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강주헌 씨가 나서서 경쟁을 조장하고 금액을 높여서 문제를 만들지 못할 거라는 얘기다.

실은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오바하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나에게도, 심정적으로는 억만금을 주고 싶을 정도로 반드시 잡고 싶은 타이틀이 생길 게다. 게다가 만약 자금도 충분하다면. 그렇다면…… 이번 한 번만 폭주해 볼까. 1억이든 10억이든 질러볼까.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꼭 지금의 다짐을 기억해 두자. 공개적으로 잘난 척은 다 해놓았으니, 쪽팔리는 일은 하지 말자. 내가 잡고 싶은 책이라면 다른 누군가도 잡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어쨌든 누군가가 잘 만들어서 우리 독자들이 읽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강주헌 씨의 신념은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고 기본이라면 기본이다. 하지만 당연하고 기본적인 이 생각이 유난히 돋보이고 ‘누구누구가 좀 봤으면 좋겠다’ 싶은 기분에 침까지 튀겨가며 내가 떠들어대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북스피어 포함해서)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아니아니, 역시 싸잡아 비난하는 일은 관두자.


어쨌든.

혹자는 이렇게 대꾸할지 모른다. 작금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아 내 돈 내고 내가 계약하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냐고. 뭐 굳이 그렇게 생각하시겠다면 그 말씀에도 일리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실제로 꽤 많은 이들이 그런 자세일 거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국제 출판시장의 호구” 운운하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한국 출판계의 이런 행태는 급기야 ‘선인세 100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문학수첩이 6월경 출간할 예정인 댄 브라운의 신작 ‘솔로몬의 열쇠’(가제)의 선인세로 100만 달러를 지급한 것이다. 해외 번역서에 대한 선인세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2만 달러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2000년대 들어 10만 달러, 20만 달러가 우습게 여겨지더니 지난해 ‘마지막 강의’의 64만 달러에 이어100만 달러까지 왔다”면서 “해외 작품에 선인세 10만 달러 이상은 안 주는 것을 불문율로 여기고 지키는 일본 출판계와 비교된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선 해외 번역서에 대한 의존이 커지면서 ‘국제 출판시장의 호구(虎口)’로 전락한 한국 출판계의 처지가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_동아일보/ 2009년 1월 22일/ 금동근 기자


계약금 자체가 상승해 버리는 여타 출판사들의 어려움은 거론하지 않더라도, 높은 선인세를 감당하기 위해 출판사가 말도 안 되게 분권을 하여 세계에서 “대한민국 독자가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읽는 셈”이 되어 버린다든가, 선인세를 건지기 위해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몰두하다가 사재기로 딱 걸려버리는 사례들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도한다. 

후져. 아아 정말이지 후지다. 적당히 자존심도 좀 찾아가면서 출판도 하면 좋을 텐데. 허긴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대답하신다면 이건 뭐 대꾸할 말이 없긴 하지만.

덧)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가 발행 12일 만에 100만 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그 기간 서점에서는 품절 현상이 끊이지 않았고 『1Q84』에 인용된 책과 음악 CD까지 더불어 호황을 누렸다고 하니 가히 ‘무라카미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현해탄을 건너온 이 책은 또 다른 이유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미 대부분의 독자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바로 선인세 때문이다.

『1Q84』는 대여섯 개의 메이저 출판사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10억을 제시한 출판사가 경쟁에서 밀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보도를 보니 한때 14억쯤 되리라 추정되던 선인세는 최종적으로 10억원에 못 미치는 금액(정확한 액수는 기업비밀이라고 한다. 참고로 북스피어에서 계약한 작품 가운데 최고 선인세는 610만원이다. 우리야 뭐 비밀도 뭣도 아니니까)에 문학동네로 ‘낙찰’된 모양이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매체들이 어처구니없이 높은 선인세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굳이 여기서 한자락 보내봐야 그다지 의미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매체들의 앞다툰 보도는 전혀 호들갑이 아니다. 왜냐. 선인세로 10억 가까이 지불했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잘못됐다기보다 부끄럽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이게 어째서 부끄러운 일인지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조차 없겠다. 비용을 지불한 출판사 스스로가 쉬쉬하며 뭉개고 넘어가려는 판이니까.

그렇다면 왜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모르겠는데ㅎㅎ, 혹시 아시는 분?


스트셀러라는 말은 ‘가장 잘 파는 사람(best-seller)’이라는 뜻이었다(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그러다가 1897년 미국의 문학잡지 「북맨」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잘 팔리는 서적’을 조사하며 베스트셀러라는 용어를 정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베스트셀러의 의미. 가장 잘 파는 사람-->가장 잘 팔리는 서적. 이렇게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여기에서의 베스트셀러는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메이저 출판사에서 밀기로 작정한 책?’. 혹은 ‘인터넷 서점의 메인화면에 올라간 책?’. 

애써 비아냥거려 보지만, 출판사에서 밀기로 한 책이라거나 인터넷 서점에서 메인화면에 올린 책이 전부 이 비아냥거림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범주에 속하지 않는 책이 압도적으로 많을 거라 믿고 있다. 다만 최근 출판계의 정가제 문제, 외서 계약금 백만 달러 돌파(미치지 않고야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 돈으로 샀다면 대관절 얼마나 많이 팔아야 한단 말인지!) 같은 소식들을 접하면서,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해 본 말이다. 

베스트셀러에 출판사의 ‘작전’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어지간한 독자들도 다 알고 있다. 아주 비근한 예로 지난달에는 자사의 책을 사재기하여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시킨 출판사 두 곳이 적발되기도 했다. 도서출판 밝은세상이 기욤뮈소의 소설을, 위즈앤비즈 출판사가 차동엽의 에세이를 되사들이다가 딱 걸리는 바람에, 2001년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이 발효된 이후 최초(나름 역사적인 사건이다)로 벌금을 물게 생겼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을 테지만, 벌금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으니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 왜 내 주위에는 베스트셀러를 읽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는 걸까. 읽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읽은 걸 쉬쉬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책을 자신의 책장에 꽂아놓는 것조차 창피해 하는 사람들뿐인 거다. 다들 안 읽었단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또 이상하다. 그런 인간들이 그 책의 내용은 쫙 꿰고 있다. 읽지도 않았는데 뭔 내용인지 다 안단다. 흠. 이와 같은 ‘기현상(분명 100만 권이 팔렸다고 하는데 주위에 읽어본 사람을 구경하기는 힘든 현상)’에 의문을 품고 작가는 이 책 『취미는 독서』라는 책을 쓰기에 이른다. 도대체 그 100만 권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파헤치기 위해 나섰다는 저자는 어느날 대학생인 듯한 두 사람의 대화(“그거 셰익스피어가 쓴 책이야?” “셰익스피어, 그게 누군데”)를 듣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모른다지만 셰익스피어를 모를 리가, 라고 당신은 의아해할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도 아니고. 셰익스피어를 모를 리 있겠어? 쯧쯧. 그러니 당신 같은 책벌레는 출세를 못하는 거요. 당신은 그들이 “정말 몰라?”라고 놀랄 만한 뮤지션이나 브랜드명을 모를 테니까. 그 점에선 피차일반이다. 이 세상에는 몇 천 부밖에 팔리지 않는 책과 100만 부나 팔리는 책이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내 생각엔 “셰익스피어가 누구더라?”라고 묻는 선남선녀의 마음까지 감동시키는 책, 이것이 100만 부나 팔리는 필수조건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지성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100만 부대의 책을 책장에 꽂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편견이다. 읽어보지 않고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시간이 아깝다고요? 그렇고말고요. 그러니 제가 읽어보겠다는 겁니다.


사실 『취미는 독서』에서 ‘베스트셀러의 독자들은 과연 누구일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기실 저자는 이런 ‘같잖음’을 비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읽지도 않았으면서 함부로 얘기하는 족속들 말이다. H. L. 멩켄의 표현을 슬쩍 빌리자면, 어떤 책을 두고 이게 좋은 책이냐 나쁜 책이냐를 명확히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우화의 형태로 만들어졌든 재테크 서적으로 포장이 됐든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다가 감정이입을 하면 그(녀)에게 그 책은 좋은 책인 것이다. 어떤 책을 두고 ‘좋다/나쁘다’라는 판단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불완전한 지성인의 착각”일 뿐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이 무리는 일 년 내내 책에 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 신간정보라면 모르는 게 없고 서평이나 책 광고도 자주 보고 읽은 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며 부탁한 것도 아닌데 인터넷에 독서 일기를 공개하기도 한다. 목적도 없이 서점이 있으면 들어가 살 생각이 없던 책까지 산다. ‘책을 둘 데가 없다’는 게 그들의 최대 고민거리지만 그렇다고 몽땅 팔아치울 용기도 없다. 그중에서도 꼴불견은 자신의 병을 병인 줄 모르고 오히려 긍지로 여기는 무리이다. 베스트셀러를 보면 “시시한 책만 잘 팔리고 있으니...”라며 탄식하고, 출판사가 경영난이라 하면 “양서가 안 팔리는 세상 뭔가 단단히 잘못 됐어”라며 비분강개하다가 마침내 “출판 문화가 위기에 처했다” “교양의 붕괴다”라며 법석댄다.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이 대목을 읽다가 ‘약간’ 부끄러웠다. 딱 한 권 읽었을 뿐인 주제에 에쿠니 가오리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논평한 자가 바로 이 몸이다. 지난번 국제도서전에서는 에쿠니 가오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며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을 향해 조소를 날리기도 했다. 탄식하다가 비분강개 비슷한 행위도 했다. 송구하다. 이 자리를 빌어 국내의 모든 에쿠니 가오리 팬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이제 에쿠니 가오리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반드시 그녀의 책을 사서 읽은 뒤에 비판이든 비난이든 하도록 하겠다. 암튼, 그래서...

...결심했다. 앞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않기로. 이건 예전부터 생각했던 ‘역지사지’이기도 하다. 역지사지라니 무슨 소리냐. 가령 북스피어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신간을 냈다 치자. 그런데 어떤 독자가 읽지도 않았으면서 ‘미야베 미유키는 매번 패턴이 똑같다느니 독자를 훈계하려 한다느니’ 하며 읽지도 않은 감상을 (자신만 볼 수 있는 일기장도 아닌 마당에) 밑도 끝도 없이 게시판이나 자신의 블로그에 떡하니 올려놨다고 가정해 보자. 아아,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진다. 나, 그런 글을 목도하고 한동안 우울했던 적도 있다. 비판이 싫다는 게 아니다. 사실 『취미는 독서』 정도의 비판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고 예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몇 권의 책을 이미 주문해 버렸다. 물론 저자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슬슬 마무리하자. “묻겠는데, 당신은 읽어본 적 있는가? 읽어보지도 않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금물이다”에서 출발한 이 책에는 ‘21세기 일본 베스트셀러의 6가지 유형을 분석하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 부제를 보고 흥미가 동했다. 하지만 이 부제는 무시해도 좋겠다. (좋은 의미로^^) 사기에 가깝다. 혹시 이 책을 읽고 문제의 여섯 가지 유형을 알게 되면 뭔가 국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던 편집기획자(이 또한 본인이다!)가 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니 관두시라. 다만, 굉장히 박력 있고 특이한 책이라는 것은 내가 보증하겠다. ‘기현상’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라면 결코 후회할 리 없다.

게다가 『취미는 독서』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베스트셀러들은 태반이 국내에서도 발 빠른 메이저 출판사들이 출간(과연 대단!!)하여 빅히트시킨 책들이기 때문에 읽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철도원, 냉정과 열정 사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오체불만족,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어떤가. 한 번씩은 들어봤거나 읽어본 책 아닌가. 그중에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도 포함되어 있다. 둘 다 일본에서는 엄청나게 팔렸으니까 포함되었을 테지. 흐음. 암튼 미야베 미유키와 텐도 아라타라니... 최소한 북스피어 독자들 가운데는 급땡기는 분들이 있을 듯한데... 어떤가요? ㅎㅎ

덧) 일전에 읽은 고종석 씨의 『바리에떼』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존 그리샴처럼 잘 팔리는 소설을 써서 파스칼 키냐르처럼 안 팔리는 소설을 쓸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다. 뭐 하나만 딱 잘 팔아서 조너선 캐럴 같은 안 팔리는 소설도 낼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참 좋겠다. 


월.
진초록의 빛깔들이 온통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계절.
헌데 돌아가는 현실은 왜 이리 쓸쓸한지.
우울한 기분을 잠시 접고, ‘다시’ 씁니다. 

올 일월부터 오늘까지, 북스피어의 상황은 지속적으로 나빠졌습니다. 가파르게 오른 환율은 내내 그 언저리를 맴돌았고, 새로 선보이는 작가들의 책이 잘 팔리지 않았고, 재고가 쌓여서 급기야 포화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들 기운이 빠졌달까요. 덕분에 활기차야 할 홈페이지도 주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격려해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하지만 정작 고마움을 표현하는 길은 역시 좋은 책을 만드는 것, 팔리지 않는다고 징징대기 전에 잘 파는 것. 그런 일련의 활동들을 이 공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제대로 보고하는 것이겠지요. 매번 그렇게 다짐하지만 잘 안 되네요. 게다가 워낙 소수정예이다 보니 마감 때가 되면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한 주, 그와 관련하여 몇 번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마침 신간의 마감이 끝났고, 앞으로 나올 신간(미야베 미유키, 마쓰모토 세이초, 반다인)들의 원고(는 죄다 마감이 지났건만)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회의에서는 모두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어요. 지금은, 서로를 다독이며(때로는 채근하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머쓱하고 새삼스러운 기분도 들지만, 그래서 ‘다시’입니다.

일단, 그것은 당분간 느슨하게나마 연재의 형태가 될 터인데 가령 저는, ‘출판’ 관련 도서의 리뷰와 출판계 소식을 단상 형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동료들도 공부하고 생각한 바를 적되, 어떤 주제로 할지는 각자 첫 글을 쓰면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매월 5일, 15일, 25일에(그리고 이 주에 한 번 올리는 포스팅이 있습니다) 업데이트됩니다. 

굳이 이런 계획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뭐랄까 역시 이렇게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합의하여 ‘귀찮은데, 오늘은 그냥 쉴까(특히, 사장)’ 하는 기특한 마음들을 자꾸 먹기 때문입니다. 새해의 다이어리적 금연 기도와 같은 심정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군요. 여튼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인지 지켜봐 주시길. 그럼, 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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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제대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교정은 온통 자격증 관련 현수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도서관은 항상 만원이었다. 도서관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나는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옆 소파에 앉아 ‘시시한’ 소설 따위를 읽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졸업반이 되어 있었다.

나는 몰랐다. 동기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교직과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외국어와 컴퓨터는 물론 들어본 적도 없는 분야의 자격증을 이미 여러 개 땄다는 것을. 내가 ‘시시한’ 소설이나 읽는 동안 그들은 ‘영양가 만점’의 실용서를 여러 권 독파했다는 것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뒤늦게, 그 무리에 끼고 싶어졌다. 서점에 나갔다. 각종 자격증 관련 책을 잔뜩 샀다. 유망하다는 분야는 한 권씩 다 샀다. 그 책들을 방구석에 처박아두기까지 딱 일주일이 걸렸다. 무슨 정보사라니... 이렇게 재미없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내내 그런 고민뿐이었다. 그런 고민들을 잊기 위해 또 ‘시시한’ 소설을 읽었다.

“전문분야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다. 저자를 비롯해 디자이너, 인쇄소, 제책소, 도매상, 서점 등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하는 존재다. 달리 말하면 편집자란 남의 덕에 먹고사는 직업이다.”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와시오 켄야)의 한 대목이다. ‘남의 덕에 먹고사는 직업’이라는 문장이 눈길을 끈다. 아아 그런가.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나는 어느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전문분야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채용되었다. 그 이 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OO 좀 부탁드리겠습니다’였다.

이 책은 일본 굴지의 출판사 고단샤에서 삼십오 년 동안이나 편집자로 생활한 이가 쓴 회고록이자 출판편집 입문서이다.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몇 달쯤 전에 책장에서 발견하고, 한 챕터만 읽어야지 하다가 끝까지 읽고 말았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편집자의 실체를 이렇게까지 유쾌하게 서술한 책을 나는 보지 못했다.

스테레오타입한 설명 없이 구체적인 사항들을 겸손하고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겸손과 담백이 확고한 신념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돋보인다. 편집자 지망생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경력자라도 35년 베테랑의 경험을 추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두면 손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무능한 편집자’인 나는 읽는 내내 감탄하고 말았다. 때때로 꾸중을 듣는 듯한 기분도 들었는데, 그럴 때는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모자란 내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편집자의 자질에 관해 거론한 부분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걸쳐 여러 번 반복하며 저자가 특히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대목――.

“요즘 들어 편집자의 능력이 저하하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왜 그럴까? 그 배경에는 인간관계를 원활히 맺을 줄 모르는 부류가 늘고 있다는 이유가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비록 자신은 무력하더라도 그 중심에 서는 것이 편집자다. 그래서 호감 가는 형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편집자에게 더욱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오늘밤 모든 바에서』 마무리 작업을 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나카지마 라모는 아직 국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데다 ‘일본’(소설이 강세인 딱 그만큼 일본 소설에 대한 선입견도 여전하다) 작가이기에 불안했다. 그렇다면 술 좋아하는 한국 작가의 추천사를 받도록 하자. 문학성도 있고 재미있는 소설이니 읽기만 한다면 누구든 고민 없이 써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받지 못했다. 갖다 붙이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좁은 나의 인간관계 속에는 이 책의 추천사를 써 줄 ‘술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없었다는 점이 가장 컸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유명’ 필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것은 역시 소극적인 성격 탓이다.

“그래서 편집자를 통해 인맥이 형성되곤 한다. 물론 그 인맥은 편집자의 정보원이기도 하지만 인맥이 구축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가 무언가를 창조할 수도 있다. 편집자는 시장 같다. 거기에 가면 새로운 발견이 있다. 재미있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거래가 오고 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 편집자는 때로 저자와 잡담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만나고 있으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관계. 대화가 통하는 관계.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난 사이므로 장래에 큰 이익이 발생할 수도 있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교제 자체가 즐겁기에 오래 이어진다. 이것이 편집자를 위한 인간 관계론의 기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관련분야 말고도 다방면에 걸친 관심사랄까 잡기에도 능해야 한다고 할까 그런 게 좀 필요하다. 뭘 또 그렇게까지, 하고 한심해하며 혀를 끌끌 찰 분도 계시겠지만, 굳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뭐든 알아두고 배워두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라’ 칠 때 번번이 나오는 ‘쫑’에도 교훈은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이것은 직접 원고를 받아야 할 필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혹... 대체 원고는 언제....

“청탁한 다음 편집자가 할 일은 때로는 저자를 격려하고 때로는 질타하며 때로는 힘이 되어주고 칭찬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속이면서 어떻게든 원고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어떤 갖은 수단을 쓰든지 원고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원고가 나오는 과정은 편집자로서도 시간을 요하고 부단한 노고가 필요한 작업이다.”

때로는 속이면서, 라는 대목을 읽다가 한참 웃었다. 이 책에 대해 이렇게 구구절절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저자가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편집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을 이처럼 ‘대놓고’ 말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몰라서 그렇지 저자의 원고가 늦으면 늦을수록 편집자의 수명은 단축된다. 대체로 언론계 출신 저자들이 늦다. 출판사의 생리를 훤히 알고 있는 통에 마감 날짜를 속이지도 못한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을 읽고 찔리시는 필자분들, 어서 원고를 넘겨주십시오. 지금 이곳에서는 다들 죽어가고 있습...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인간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편집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냐는 항의를 들을 것 같으니, 약간의 변명을 써 놓아야겠다. 세상에는 ‘인간성이 좋지 않은 편집자’도 부지기수다. 다만, 이왕이면, 하는 정도로 마무리해 둘까. 졸업하자마자 편집자로 시작해서 아직 그럭저럭 편집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 역시 과히 인간성이 좋은 편은 아니니까.

덧) 편집자의 능력과 관련하여 음미할 만한 일화가 있기에 인용해 둔다.

“자네가 물귀신처럼 독촉하니 하는 수 없이 나는 쓴다.” 나가노 시케하루가 한 문학 편집자에게 보낸 시다. 물귀신. 원고를 독촉할 때의 편집자는 다름 아닌 물귀신이다. 사실 물귀신처럼 하지 않으면 원고를 받을 수 없다. 역시 나가노의 수필집에 나오는 일화를 소개해 보자. 나가노의 육친 초상날 문상을 온 편집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며 인사하였다. 그는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그 뒤의 일이다. 편집자가 손을 내밀며 ‘그런데 원고는 어떻게...’ 나가노는 초상날 별 수 없이 한쪽 구석에서 원고를 썼다고 한다. ‘부모가 죽어도 마감은 마감’이었다. 글을 쓴다는 건 그만큼 냉엄한 작업이다.
우선 저자와 플롯을 짰다고 하자. 남은 건 저자가 ‘열심히’ 원고를 집필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인데 생각처럼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는다. 학교 일이 바빠서, 이번에는 몸이 아파서 원고가 늦어질 것 같은데...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그걸 돌파하는 것이 편집자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