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출판 모임에 갔다가 한스미디어 대표가 지리산 종주를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2박3일 일정이라고 한다. 서울 한복판 술집에 앉아 있는데도 이렇게 추운데(그날 밤은 특히 추웠고 계속 수은주가 떨어진다는 예보가 있었다). 밤에 출발하는 지리산이라. 게다가 종주라니. 좋은 타이밍은 아니다. 그건 그렇고 김기옥 대표의 지리산 종주 계획은 나에게 십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혼자서 설악산에 오른 적이 있다. 한겨울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변변한 산행장비도 없었다. 등산화와 장갑 정도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우리 동네 길바닥에서도 입고 돌아다니는 파카. 약간 큰 배낭. 아침에 출발할 때 김밥 네 줄과 물 한통을 샀다. 왜 그때 혼자서 산을 찾았는지는 창피해서 말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근사한 이유는 아니다.
아침 일곱 시 몇 분에 동서울 터미널을 출발하여 설악까지는 네 시간. 가는 내내 졸았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소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매점에서 오천 원짜리 아이젠을 샀다. 조악해 보였다. 나중 일이지만, 아이젠은 3보 이상 걸으면 벗겨지곤 했다. 코스는 비선대를 거쳐 희운각 대피소를 지나 대청봉에서 일박을 하는 것으로 잡았다. 새벽에 일출을 보고 백담사 쪽으로 내려올 작정이었다.
산에 오른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출출했다. 휴게소는 조금 전에 지나쳤고 지나가는 이도 보이지 않았다. 축축하지 않은 바위에 앉아 김밥을 꺼냈다. 차가웠다. 해가 지기 전에 대청봉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딱딱해진 김밥을 먹었다. 장갑은 벗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이정표를 보니 희운각 대피소까지는 이 킬로미터 거리였다. 눈발은 심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가면 대청봉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판이었다. 대피소를 지나 일 킬로 정도 걸었을까. 눈이 엄청난 기세로 내리기 시작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일 분가량 하늘을 보며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면 끝까지 오르는 수밖에 없다. 평소에도 곧잘 죽겠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당시를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바지와 신발은 이미 젖었다. 걸을 때마다 벗겨지는 아이젠을 고쳐 매는 것도 이만저만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정상 쪽에서 뭔가가 내려왔다. 사람이다. 양쪽으로 스틱을 짚으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얼핏 보기에도 전문 산악인 같았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지금 그 차림으로 올라가면 죽는다고 했다. 자기도 눈이 너무 와서 대청봉을 포기하고 희운각으로 간다면서. 나는 한 마디 토도 달지 않고 그를 따라 대피소로 되돌아갔다. 도착했을 때는 정강이까지 눈이 쌓여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갑자기 퍼붓는 눈을 피해 하룻밤 머물다 가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말 그대로 대피소였기 때문에 자리는 협소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인, 앳된 얼굴의 학생, 막 제대한 듯한 청년, 그리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아가씨. 우리까지 모두 일곱 명. 아니 대피소 관리인까지 여덟 명.
나를 끌고 내려온 산악인은 붙임성이 좋아서 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 사람의 제안으로 우리는 각자가 가져온 음식들을 한자리에 꺼내놓고 빙 둘러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다. 세상이 좁아진 듯 고립되어 있다는 상황이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운 것이리라. 하긴, 원래 산에서는 평소에 무뚝뚝한 사람도 곧잘 낯선 이와 교감하곤 하니까.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불고기도 지글지글 구웠다. 팩소주가 열 병 남짓. 나는 먹다 남은 김밥을 꺼냈다. 우리는 제수알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돌아가며 산을 찾은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이가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오자고 했어요. 산에서 만났거든요. 대청봉에 올랐다가 일출 보고 공룡 쪽으로 가려고요.” “공룡? 내일이면 눈이 얼어서 위험할 텐데.” “괜찮아요. 작년에도 왔었고.”
말주변이 없는 나도 이야기했다. 물론 여기서는 밝히지 않지만. 딱 한 사람. 사연이 있어 보이는 아가씨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간간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팩소주는 이내 동이 났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대피소 관리인이 매점에서 파는 소주를 가져왔다. 종종 그러는 모양이다. 나는 치사량을 넘겼다. 술은 잘 들어갔다.
즐거웠지만 하루 종일 산을 탔으니 다들 피곤했으리라. 누군가 졸기 시작하니 자리가 정리되었다. 나 역시 등을 붙이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메스꺼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산 중턱에서 따뜻한 물도 없이 급하게 먹은 김밥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복통이 시작되었다. 명치가 턱 막혔다. 배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신음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하며 끙끙 앓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현기증이 났다.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입에 손가락을 넣으니 토사물이 쏟아진다.
열심히 게워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돌아보니 사연 많아 보이는 아가씨다. 눈을 한움큼 집어 입을 헹구고 여자의 부축을 받아 다시 자리에 누웠다. 복통은 그대로였다. 소란스러웠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깨기 시작했다. 전문산악인 아저씨가 엄지손가락을 따주었다. 대피소 관리인은 소화제를 가져왔다.
아프니 서러웠고 서러우니 눈물이 났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래도 속은 약간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안심했는지 모두들 다시 잠들었다. 사연 많아 보이는 아가씨가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돌아눕게 하더니 천천히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주위는 양들이 한 마리도 남김없이 사라진 방목지처럼 고요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만 됐다는 의미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한동안 놓지 않았다.
결국, 그날 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날씨가 어땠더라.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해져 있지만 등을 쓸어주던 따뜻했던 손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무슨 사연이 있어 그녀가 한겨울 설악을 찾았는지는, 여전히 알 도리가 없다.
덧) 글 중간에 거론한 제수알도의 소설 제목은 『그날 밤의 거짓말』(제수알도 부팔리노/ 이레/ 2008년)이다. 극적인 반전이 있는 재미난 소설이니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