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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일로 밴스, 등장. (36) 2009/02/20
추리소설에 푹 빠졌던 중학교 시절을 기억합니다. 셜록 홈즈가 강호를 평정하고 겨우 포와로가 그에 맞서 균형을 잡고 있던 시절, 마플 양과 뤼팽 씨가 주변에 머물던 그런 시절, 탐정이란 오로지 홈즈만을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했던 때 그렇게 전설의 '자유추리문고'는 등장헀습니다. 거기서 저는 절름발이, 장님, 술주정뱅이도 탐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죠. 거기서 전 최고의 탐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파일로 밴스입니다.

아직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담배꽁초니 립스틱 자국이니 마차 바퀴자국을 증거로 범인을 알아맞히는 것만이 추리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제게는 밴스의 추리 기법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물적 증거는 오히려 부차적이며, 범인의 “심리적 흔적”을 따라 범죄를 커다란 구조 안에서 완성시켜야 한다니요. 게다가 잘난체하는 독설가라니. 진짜 잘났기 때문에 더 얄밉죠;;; 파일로 밴스의 성격은 ‘현학’ 그 자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지적이고 감수성도 풍부한 진정한 귀족이죠. ㅎㅎ 암튼, 밴스를 만난 뒤로 제게 최고의 탐정은 밴스였습니다.

왜 밴스 얘기를 갑자기 하냐고요? 혹시 지난 3주년 이벤트 때 제가 어느 독자분의 댓글에 단 답을 기억하실 분이 계신가요. 그때 제 꿈이 “S. S. 반 다인의 전집”을 제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죠. 또, 지난 2009년 출간 예정작 중에 ‘보물’이 있다면서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기억하시나요?

네에, S. S. 반 다인 완역 소장판이 드디어 옵니다.
올여름 첫 권을 시작으로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 전작 출간을 목표로 출항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작품 『딱정벌레 살인 사건』(과 소개되지 않았던 다른 작품 하나)을 시작으로 번역자 선생님이 이미 분투중이십니다. (누군지 아시면 까암짝 놀라실걸요? 우후훗~) 저희 계획은 한국에 출간되지 않았던 작품을 포함하여 두 작품씩 한 권의 책으로 묶어 6권 전질을 만들 목표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선집 형태의 2~3권 분량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습니다. 전집 출간을 약속드리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 주시겠지만) 미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꾸벅*

한국에 이런저런 판본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도 사실인데, 이번 판본에서는 파일로 밴스의 현학적인 대사의 맛을 제대로 살려 고전 미스터리의 매력을 담뿍 맛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제야말로 마음먹고 제대로 만드는 완역 소장판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여러분을 모두 밴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음하하하. 소식은 계속 전달하겠습니닷! -虎-

S. S. 반 다인이 대체 누구이길래?

저 혼자 흥분해서 호들갑을 떨었지요? 반 다인이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미스터리를 꾸준히 읽어 오시지 않은 독자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제가 이렇게 흥분하는지 어리둥절하실 테고요. 에헷. 반 다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시거나 대강 소문으로만 들으셨던 분들을 위해 대강 보충 설명.

반 다인은 처음부터 미스터리 작가는 아니었어요. 그는 원래 고고학이나 인류학 등의 인문학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미술과 음악 같은 예술 분야의 비평가로 활동했는데, 신경 쇠약증에 걸리면서 책과 펜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엄명에 소일거리를 찾다가 가벼운 소설 정도를 허락받고는 미스터리를 탐닉하기 시작했죠. 그러는 동안 하찮게 여겼던 미스터리가 나름의 규칙과 매력을 가진 "고급 오락"이라는 걸 깨닫고 그때까지 나온 미스터리들을 모두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미스터리 평론가로서의 안목까지 갖추게 되지요.

그는 온갖 결점들을 안고 있는데도 잘 팔리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가, 자신이라면 더 훌륭한 미스터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왠지 파일로 밴스처럼 오만방자 -_-) 그러고는 그때까지의 진부한 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구성을 가진 미스터리를 세 권 한꺼번에 뚝딱 써냈다고 해요. 그렇게 시작된 파일로 밴스의 발걸음은 세 권으로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최고의 자리를 꿰찼지요.

반 다인은 그의 필명인데요, 본명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 그때까지만 해도 미스터리 작가란 미국에서도 그다지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인데다 평론가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필명을 썼다고 하네요. 그는 미스터리를 "지적인 게임"이라고 불렀는데 파일로 밴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에는 확실히 범인을 잡거나 독자들의 눈을 가리는 트릭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지요. 그가 원래 관심하고 있던 고고학이나 예술, 고전, 언어학 등의 폭넓은 지적 탐구 의식과 평론가로서의 엄격한 시각에 예술적인 감성이 결합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반 다인은 병실에서 얻은 미스터리 독서 경험(그가 읽은 미스터리가 수천 권에 달했다고 하지요)을 바탕으로 관련 논문도 집필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스터리 작가가 지켜야 할 20가지 규칙>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도 팬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당대 미스터리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앤솔로지를 엮기도 했는데 이것이 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반 다인의 작품은 모두 열두 권이에요. 단 열두 권으로 20세기 미스터리에 지워지지 않는 굵은 획을 그었습니다. 그는 사실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작품 수는 모두 여섯 작품이라고 했다고 해요. 다른 작가에 비하면 적은 작품이지만 그의 기준에 비하면 너무 많은 양을 썼지요. 그래서일까요? 앞의 여섯 권은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뒤의 여섯 권은 조금 낮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반 다인의 작품 안에서의 상대적인 평가일 뿐, 다른 작가에 비한다면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보이고 있으니 열두 권 모두 반드시 읽어야 할 미스터리 고전에 포함되어 있죠.

파일로 밴스에게는 왓슨의 역할을 하는 '나' 반 다인 외에 뉴욕 지방 검사인 매컴이 콤비로 활약합니다. 매컴은 정의롭고 강직하지만 고지식한데다 융통성 없는 인물로 등장해요. 밴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은 왓슨 역할을 하는 반 다인이 아니라 매컴 쪽이죠. 사실 밴스는 홈즈처럼 '탐정'의 명찰을 달고 있진 않습니다. 그저 검사인 매컴의 친구로서 '조언'을 하는 역할이니까요.

반 다인 작품의 재미는 밴스와 매컴, 반 다인의 나누는 대화에 80% 이상이 있습니다. 잘난 척에 진짜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밴스야 그렇다 쳐도 매컴과 화자인 반 다인 모두 하버드 출신의 현대 뉴욕의 귀족이나 다름 없거든요. 예의 바르고 교양이 넘치며 품위까지 갖춘 이들이 범죄를 눈앞에 두고 벌이는 대화는 작품의 백미!

아아, 이렇게 쓰다 보니 할 말은 늘어가고 정리는 더더욱 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서 내고 싶은 욕망(네, 그렇습니다. 욕망입니다.)이 치솟아 어쩔 줄 모르겠어요. 번역자 샘 독촉하러 가야겠습니다. 음핫!